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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영화 속 현실과 만나다

그를 누가 ‘바보’라 부르는가

<행복한 울릉인>(2010)
감독 : 황석호

순수한 웃음이 선사하는 잔잔한 감동
<행복한 울릉인>은 울릉도에서 태어나 70년
넘는 세월을 울릉도에서 살고 있는 상호 할아버지를 주인공을 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행복한 울릉인>은 모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상호 할아버지>란 제목으로 방영되어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상연시간만 두배 가까이로 늘었을 뿐 내용에서는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다). 황석호 기자는 할아버지를 배려하는 섬마을 사람들의 따뜻함과 상호 할아버지의 순수한 웃음을 관객에게도 전하고 싶어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카메라에 자주 잡히는 보름달이 환기하듯, 영화는 추석을 전후한 시간 동안 상호 할아버지의 궤적을 좇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덕담처럼 한국인에게 추석은 풍요로운 한 시절을 상징한다. 그래서인지 카메라에 잡힌 울릉도의 풍경은 상당히 넉넉해 보인다. 울릉도의 이웃들은 지적 장애를 지닌 74세의 할아버지를 배려하고 보살피는 데 결코 인색하지 않다. 식당 주인은 당연하다는 듯 한 끼 식사를 제공하고, 이발사 아저씨는 무료로 이발을 해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카메라가 이렇듯 선한 이웃을 부지런히 좇아가다가도, 문득 상호 할아버지의 뒷모습이나 더러운 발뒤꿈치를 비춘다는 것이다. 영화는 상호 할아버지를 보살피는 선한 이웃의 존재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서 동떨어져 있는 할아버지의 위치를 정직하게 환기해 주는 것이다. 시장 상인들이 프라이팬에 물고기와 오징어를 구워 즉석에서 술 한 잔을 나누고 있는 그때, 카메라에는 그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주변을 서성이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잡힌다. 그래서 스크린을 가득 메운 왁자지껄하고 흥성스러운 시장의 풍경을 보면서도 관객은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상호 할아버지가 던지는 질문
매일 저축을 하면서도 통장 잔고가 얼마인지 모르는 할아버지, 그러면서도 집 사고 결혼하는 게 소원이라며 웃어 보이는 할아버지는, 세상 기준으로 볼 때 분명 ‘바보’다. 문학에 등장하는 바보 캐릭터에 관심이 많았던 러시아의 문예학자 미하일 바흐친은, 바보의 우둔함에는 세계를 다른 눈으로 보게 하는 지혜를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상호 할아버지의 삶 역시 관객에게 세계를 새롭게 볼 깨달음을 제공한다. 즉, 우리는 할아버지의 일상을 따라가다가 그가 정말 바보인가를 질문하며, 또한 우리는 얼마나 똑똑하기에 그를 바보라고 부르는지 스스로 묻게 된다.
상호 할아버지는 울릉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에 출석하는, 가장 오래된 집사님이다. 학교에 가보지 못한 터라 성경책은 펴 놓는 시늉만 한다. 할아버지가 올리는 기도는 도통앞뒤가 맞지도 않고 엄밀히 말하면 비성경적이다. 하지만 그는 노동의 대가를 치르지 않은 한 끼 식사를 원하지 않는다. 찬 없는 한 끼밥에도, 보잘것없는 간식거리 하나를 받아 들고도 감사기도를 빼 먹지 않는다. 하루 몇천 원에 수입을 모아 일주일에 한 번 감사헌금 드리기도 잊지 않는다. 그의 일상을 보건대, 울릉도에서 상호 할아버지보다 더 믿음 좋은 사람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니, 이 땅 어디를 둘러보아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파안대소破顔大笑라는 표현이 제격인 할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게 할아버지를 바보라고 부를 자격이 있을까. 할아버지의 웃음을 순진하고 해맑다고 판단하는 것도 나만의 착각이 아닐까.
상호 할아버지라고 해서 왜 고독과 쓸쓸함을 모르겠는가 말이다. 

정재림|2010년 제8회 서울기독교영화제 영화비평 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