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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매거진<오늘>/문화선교연구원

우리 안의 타자와 교회의 과제

영화 <무산(茂山)일기>
(박정범, 2011)

이창동 감독에게 사사했던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는 자신의 단편영화 ‘125 전승철’을 장편으로 만든 것인데,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못할 정도로 연출력과 영화적 서사능력이 압도적이다. 각종 영화제 수상 이력이 영화의 질을 충분히 입증해주고 있다.

한의 무산계급, 탈북자
영화의 주인공은 함경북도 무산(茂山) 출신 탈북자 전승철이다. 감독의 관심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북하여 남한에 이르게 된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에서 무산(無産)계급으로 살아가는 실상과 왜 그렇게 전락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려는 데에 있었다. 예컨대, 누구라도 탈북자임을 식별할 수 있는 주민등록번호 ‘125’를 딱지처럼 달고 다니고, 탈북자라는 이유만으로 동네 깡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현실에서도 친구를 우발적으로 죽이고 도망 나온 그에게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기에, 남한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무런 저항조차 할 수 없는 무력한 태도,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인 남한에 쉽게 동화되지 못해 탈북자들끼리 소통하면서 혹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살 수 밖에 없는 모습들은 그들로 하여금 무산계급으로 살아가도록 만드는 구조적인 요인들이다.
정책적으로나 혹은 사회적으로 혹은 시민의식적인 면에서 볼 때, 이에 대한 남한 사람들의 책임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는 자로 하여금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게 만드는 장면들이다. 탈북자, 그들은 우리 안에서 오직 타자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정치사회적 환경 속에서 감독은 무산출신의 무산(無産)자인 전승철에게 주목한다. 그는 자신을 고용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잘 할 수 있습니다”를 외치며 생존의 의지를 내보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번번이 좌절을 경험한다.

탈북자의 눈에 비친 교회
영화 속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주목을 끄는 장면은 승철의 눈에 비친 교회의 모습이다. 승철이 교회에 가게 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정착 과정에서 누군가에 의해 소개된 것이리라. 그러나 승철에게 교회는 단순히 예배의 장소만이 아닌 또 다른 의미를 갖는 공간이다. 사실 교회에는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오거나, 그를 공동체 안으로 이끌어 들이려는 사람이 없다. 그는 교회 안에서 철저한 타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철은 결코 불편해하지 않는다. 이미 남한 사회에서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그러한데 ‘교회’라고 해서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교회는 그에게 맘에 드는 여자 숙영을 볼 수 있는 곳이며, 또한 아무런 걱정 없이 점심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다. 다시 말해서 억눌려진 자신의 욕망을 최소한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왜냐하면 승철이 그녀를 주목하여 본다는 것은 키에슬로프스키의 연작 영화 <데칼로그>에 따르면, 곧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숙영이 승철을 보는 시선은 대조적이다. 승철은 철저하게 관심 밖의 존재, 곧 타자다. 늘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지만 전혀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병약하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노래방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손님들이 노래 도우미들에게 행하는 성적 희롱을 저지하려다가 시비가 붙게 된 승철을 보는 그녀의 시선은 영업을 방해하는 존재이며, 게다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구제불능의 사람이고, 게다가 승철이 자신과 같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확인하면서부터는 기독교인인 자신의 이중성이 폭로되는 듯한 느낌을 일깨우는 불편한 존재일 뿐이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숙영이 선택한 길은 승철을 해고하는 것이다. 교회라는 곳이 오직 종교의식을 위한 장소이고, 그리스도인들은 한낱 의식을 행하는 자일뿐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부정적인 이미지다.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나 <박하사탕>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장면들이다.

받아들임의 시작
한편, 더욱 주목할 만한 사실은 교회에 대한 승철의 시선이 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같은 탈북자 출신의 소개로 교회의 소그룹 모임에 참석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왜 탈북하게 되었는지를 고백하는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인해 그에게 있어서 교회는 더 이상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곳이 아니며 또한 그의 시선도 이제는 숙영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게 된다. 교회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곳이고, 동시에 받아들임을 경험하는 곳이었다. 이를 계기로 숙영의 오해는 풀리게 되고, 승철이 노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 그녀는 승철이 성가대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안내해준다. 그리고 승철은 다시금 숙영의 가게에서 일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되는 일에 있어서 적극적인 노력을 보인 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타자였던 승철 자신이었다는 사실에 필자는 주목하게 된다. 비록 처음 동기는 숙영에 대한 자신의 욕망이었고, 또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실망을 경험했지만, 승철이 결국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볼 때는 그 자신의 적극적인 노력이 큰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처음에 등장하는 교회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감독의 교회비판적인 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이유가 되지 못한다. 영화 속에서 교회는 타자됨의 극단적인 모습과 변화를 표현하기 위한 미장센이었다. 감독은 이런 배경에서 오히려 탈북자들의 타자됨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탈북자 스스로에게 부가시키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예컨대 동네 깡패에게 늘 매 맞는 자로만 있다가 불현 듯 그들을 압도하는 힘을 발휘하여 새로운 삶의 공간과 여유를 얻어낸 것이며, 또한 착하게만 살아온 승철이 같은 탈북자들에게서 부당하게 번 친구의 돈을 가로채는 행위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삶의 이중성
그렇다면 영화 속에 나타난 교회 이미지의 ‘변화’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실 세속과 거룩의 영역을 오가는 삶에서 이중성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감독은 이미지의 변화를 통해 승철의 시선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것 같다. 숙영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시선이 바뀌어졌고, 또한 그와 더불어 승철에 대한 인식이 타자에서 공동체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소극적인 태도에서 적극적인 삶의 자세로 변하기도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잘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숙영과 함께 다시 일하게 되면서 그에게 희망의 빛이 머물렀다고 생각하는 순간, 감독은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이제 행복의 시작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에 자신의 분신과도 같이 여겨온 백구의 죽음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승철은 오랫동안 죽은 백구를 바라보다가 머뭇거리며 길을 재촉한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한 마리의 개였던 것처럼…. 감독은 이 장면에 대한 해석을 이 땅에서의 삶이 그런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누구의 죽음이든 그것에 더 이상 연연해할 여유가 없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야하는 것이 바로 우리 안의 타자들, 곧 탈북자들이다.

이 영화는 특히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교회에서 탈북자들은 늘 구휼의 대상이었다. 주는 것에 대해 만족할 것이고 또한 그런 방식의 삶이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당장 먹고 살 것이 막막하다 보니 생활안정을 위해 구휼을 베푸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크로싱>에서 탈북자의 심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 앞에서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는 교회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이, 이것은 탈북자의 심경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행위이며, 종교의 일방적인 폭력과 같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구휼이 아니라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제도적인 장치이며, 또한 그들이 타자가 아니라 우리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심리적으로 배려하는 일이다.
최성수 박사

참조
무산계급 _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여 생활을 영위해 가는 무산자(proletaria)로 이루어진 계급을 지칭하기 위하여 독일의 사회학자인 K.마르크스가 1840년대에 사용한 개념이다. 노동자계급 또는 피지배계급을 지칭하기도 하는 말이다. [출처] 프롤레타리아트 [Proletariat ] |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