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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고전으로 오늘을 읽다

문장을 훔쳐 오늘에 푼다 ㅣ 파스칼의 <팡세>를 읽다

“4. 내가 어떤 새로운 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소재들의 배열이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공치기를 할 때 쌍방이 치는 공은 같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공을 더 잘 보낸다. 차라리 내가 옛말들을 사용하였다고 내게 말해주면 좋겠다.

944. 말들을 다르게 배열하면 다른 뜻을 나타내고, 뜻을 다르게 배열하면 다른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 파스칼 지음, 이환 옮김, 민음사, 2003

이 연재의 제목은 “고전으로 오늘을 읽다”입
니다. ‘고전’만 읽기도 벅찬 일인데, 고전으로 ‘오늘’도 읽어내야 합니다.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픈 일이라며 엄살을 부리다가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며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팡세>를 펼쳐들었습니다. 따악! 죽비로 정
수리를 후려치는 듯, 파스칼은 눈이 번쩍 뜨이는 소리를 들려줍니다. “뭐, 고전으로 오늘을 읽는다는 게 어려워 죽겠다고? 거, 참, 답답 돋네. 이 친구야, 일단 그때 거기서 쓰였던 옛말을 이리로 가져와봐. 그리고 지금 여기에 새롭게 배치해봐. 자, 저절로 새로운 의미가 나오잖아! ”
파스칼은 이런 간단하고 획기적인 방법을 즐겨 사용해서 ‘생각’이라는 뜻의 <팡세>를 저술했습니다. 파스칼의 방법으로 파스칼의 팡세를 사유한다면, 그러니까 약 400년 전에 프랑스에서 파스칼이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언어를 통해서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 해석한다면, 어떤 의미를 낳을 수 있을까요?

연관되지 않는 것들을 연결 짓는 것은 상상력입니다. 오늘 일어나는 사건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상상력을 가지고 파스칼의 팡세에 나온 구절을 인용해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생각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 일본에서 대지진이 발생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요. 이 재난의 상황에다 팡세의 가장 유명한 구절을 겹쳐보겠습니다.

391.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박살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뿜은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한번 뿜은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후쿠시마의 원전사고가 나서 방사능에 노출된 냉각수가 증기로 변하여 한 차례 대기 중에 검은 연기로 드러났을 때, 파스칼의 이 표현을 정말 실감했습니다. 원자력이라는 엄청난 에너지를 개발했던 인간은, 한 번의 증기에 노출되면 죽기 충분할 만큼 나약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다시금 파스칼이 제시했던 ‘갈대’라는 은유로 인간을 생각해봅니다. 파스칼은 연약한 인간의 존엄성이 ‘사유’思惟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단언했습니다.

391.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곧 도덕의 원리이다.

파스칼에게 올바르게 사유한다는 것은 이성의 한계를 아느냐의 문제입니다. 첨단의 과학으로 원자력발전소를 지었기에 어떤 재난에 완벽하게 대비하고 있다고 예상했지만, 그 예상을 뛰어넘는 지진이 일어났지요. 참된 이성은 이성의 한계를 잘 압니다.

373. 이성의 최후의 한 걸음은 자기를 초월하는 무한한 사물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데까지 이르지
않는다면 그 이성은 허약할 뿐이다. 자연적 사물들도 이성을 초월한다면 초자연적 사물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것인가.

파스칼은 사람이 올바르게 사유한다면, 이성의 한계를 인정할 것이고 인간의 한계도 인식할 것이며, 그래서 신을 사랑하는 일에 인생을 걸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올바르게 사유하는 데 실패합니다. 가령, 한국 교회의 몇몇 지도자들이 저지른 추문에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파스칼의 통찰을 중첩해 봅니다. 마치 그가‘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그의 언어는 사태의 본질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257.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불행하게도 천사가 되려는 자가 짐승이 된다.

383. 자신의 비참을 모르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모르고 자신의 비참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 중간이다. 그 안에서 신과 우리의 비참을 동시에 만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읽으셨나요? 20세기 최고의 화가 중 하나인 피카소Picasso는 이렇게 말했다지요. “훌륭한 예술가는 베낀다. 하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위대한 사상가였던 파스칼도 고전에서 마음껏 언어를 가져와서 마음대로 배열하는 방식으로 <팡세>라는 작품을 창조하였습니다. 우리도 천재의 언어를, 천재의 방법을 과감하게 베끼고 훔쳐서 오늘을 읽어보면 어떨까요?
그렇게 접붙인 생각의 가지에서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의미들이 아름답게 꽃피어날 것입니다.
현재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세 종류의 <팡세> 원고가 있습니다. 하나는 파스칼의 자필 원고인데, 파스칼의 조카가 포르로이얄판이라고 불리는 초판을 출판하면서 본래의 순서를 뒤바꾸고, 단편 중 일부를 빠뜨려놓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자필 원고보다 다른 두 개의 사본이 오히려 본래 원고 상태에 가깝다고 본다고 합니다. 두 사본은 순서와 배치가 다른데, 제 1사본을 따른 라퓌마 판은 민음사(이환 옮김, <팡세>, 2003)에서 펴냈고, 제 2사본을 따른 셀리에 판은 서울 대학교 출판문화원(김형길 옮김, <팡세>, 2010)에서 펴냈습니다. 글 이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