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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매거진<오늘>/문화선교연구원

상처에 대한 성찰

<인 어 베러 월드>(2010)
감독 : 수잔 비에르
배우 : 미카엘 페르스브렁, 트린 디어홈, 율리히 톰센

2011년 5월 성폭행을 당한 여성 피해자가 판사의 심문에 심한 모욕감을 느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 피의자에 대한 판결을 내린 후에 담당 판사는 진실을 확인하기 위한 불가피한 질문임을 역설하면서도 후회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피해자인 여성이 받은 마음의 상처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것은 마음의 상처가 육체적인 상처(성폭행)보다 얼마나 더 심각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상처
외상 후 증후군이 있어서 외상의 경우에도 치료 후에 심리적인 치유가 병행되곤 하지만, 현대인에게 있어서 마음의 상처는 스트레스의 주요 요인이다. 왜냐하면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마음대로 반응할 수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대한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거나 치유되지 않으면 마음의 상처는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하거나 혹은 더욱 큰 질환인 심장병이나 암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외상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여겨져야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친밀한 관계를 갖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입거나 준다. 가족일 경우가 많으며, 학교나 직장 혹은 이웃과 같이 주로 자신들의 생활 범위에서 일어난다. 상처를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뱉는 말과 거침없는 행위가 있을 수 있다. 상대를 위협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이것은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한 하나의 보복행위이거나 혹은 자신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일종의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이다.
상처를 주거나 입는 일은 대개 부지중에 발생하며 심기에 따라 달라진다. 마음이 연약하여 작은 충격에도 상처를 입는 사람이 있지만, 심한 충격에도 좀처럼 상처를 입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상처는 오해에서 비롯될 수 있고, 힘을 과시하기 위한 폭력에서 올 수도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일 수 있고, 부모의 불화일 수도 있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서 올 수도 있고, 상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오고가는 말들이 원인일 수 있다.

상처가 불러오는 일들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혹은 상처에 반응하는 길 역시 다양하다. 상처를 입힌 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상처를 가하는 보복이 있는가 하면, 사죄를 받아내기도 한다. 상처에서 벗어나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관계를 단절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상처로 인한 고통에 짓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상대방이 과실을 인정하면 용서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로 삼지 않기도 한다. 이것은 대단한 이성적 자제력을 요구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상처를 받는 일이 있지만, 외부의 충격 혹은 폭력을 당한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상처로 이어지진 않는다. 한 번의 아픔과 충격으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상처를 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을 찾아내서 내적으로 단련해야 상처를 받는 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마음의 상처가 자존감 손상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고 또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충격적이면서도 불쾌한, 혹은 고통스런 경험이라서 사실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아물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단지 세월에 의지해서 상처를 덮어두려고 한다면 당장에는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얼마 가지 않아 곪아터지게 된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치유라기보다는 망각에 가깝다. 단지 잊는 것일 뿐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상처는 자존감에 심각한 손상을 입는 것이다. 이로 인해 또 다른 상처를 유발하는 보복 행위는 정상참작은 되지만 사회적으로 금지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연쇄적인 폭력으로 이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에 대한 테러와 이스라엘 정부의 보복테러를 주제로 삼아 만든 영화 <뮌헨>(스티븐 스필버그)은 폭력이 어떻게 재생산되고 확대되는지를 매우 잘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폭력의 생산과 재생산, 곧 폭력의 확산과 연쇄적인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무작정 참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생각한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작정 법에 호소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상처와 관련된 일은 법적 해결에 의지할 만한 정도에 미치지 못하거나 혹은 법에 의존할 사안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법적 차원에서 다루어질 일이라면, 국가는 민사 혹은 형사 재판을 통해 어느 정도는 상처를 받은 자의 보복을 대행한다. 그러나 법적으로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마음의 상처는 여전한 경우가 많다.

상처, 악순환의 연속
게다가 더욱 큰 문제는 마음의 상처는 단지 아픔과 슬픔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이 깊은 상처를”이란 제목의 시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상처를 입은 사람의 슬픔을 아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바로 상처를 준 사람이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상처 입은 사람들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다. 의도적인 것은 물론이지만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로 인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동일한 상처를 경험하지 않는 한 그렇다. 상처 받는 사람은 자존감에 큰 손상을 입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기를 꺼리며 그래서 더욱 외로울 수밖에 없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이것이 우리의 몸과 영혼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는 불을 보듯 분명한 일이다.
마음의 상처는 이처럼 영혼에 깊은 흠집을 남기는 것이라서 단순히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 상처는 반드시 치유 받아야 한다. 만일 상처로 인한 고통과 슬픔, 그리고 외로움이 극복되지 않는다면 더욱 깊은 늪에 빠지게 된다. 예컨대, 트라우마는 어릴 때 입은 상처가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어 성장 과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경우다. 치유하지 않고 방치된 상처는 우리의 마음에 암적 요인이 된다. 그렇다면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가?

상처 극복의 열쇠

<인 어 베러 월드>는 상처에 관한 영화다. 이야기는 덴마크의 작은 시골 마을과 아프리카 난민촌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배경은 단순하지만, 스토리라인의 다층 구조로 인해서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수작이다. 각종 상처와 상처의 원인, 그리고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집중하고 있어서 주제 전개에 있어서도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다. 감정이 폭발할 만한 상황에서도 얼굴 표정과 절제 있는 대사만으로 내면을 표현해내는 배우들과 아역들의 연기가 압도적이지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나 음악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화제 거리 가운데 하나다.
영화는 상처와 관련한 현대인들의 삶의 단면들을 보여줌으로써 상처의 다양한 이유들과 상처를 입었을 때 나타내는 현대인들의 반응들을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크게 본다면 영화는 어른과 아이들의 사회에서, 그리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외국인에 대한 차별 행위에서 일어나는 상처들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상처들, 그러나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 위해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상처들에 얽혀 있는 이야기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상처들은 남편의 외도로 인해 받은 아내의 상처, 엄마의 죽음을 두고 아버지에 대한 아들(크리스티안)의 오해에서 비롯되는 상처,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집단 따돌림을 받는 아이(엘리아스)의 상처, 학교로부터 받는 부모의 상처, 외국인을 차별하는 남자에게서, 그것도 아들이 보는 앞에서 뺨을 맞은 아빠로 인해 받은 아들의 상처, 그리고 아프리카 난민촌 여성들이 반군 지도자의 폭력적인 만행으로 인해 당하는 상처 등이다.
이런 일련의 상처들을 다루는 이야기 전개에서 인상 깊은 점은 섣불리 용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용서를 말하긴 하지만, 영화는 상처를 준 자들을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상처 받은 자의 고통을 먼저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탈 행위들의 배경에는 트라우마와 어른들에 대한 아이들의 오해가 있음을 설득한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일탈 행위들에 대해 사회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수용하고 용납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다양한 질문들을 성찰하고 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힘

남편의 외도로 인해 받은 아내의 상처는, 만일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함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결별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학교 친구들에 의한 집단 따돌림에 대해 무력하게 대처해도 괜찮은가? 그렇다고 해서 폭력으로 보복해도 괜찮은가? 가족 안에서 오해할 만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자세한 이유를 묻지도 않은 채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과 행동을 해도 괜찮은가? 그 결과는 무엇인가? 폭력의 피해자라고 해서 반드시 폭력으로 보복을 해야만 하는가? 소수자로 살아가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에 대한 폭력적인 반응은 정당한가?
관객들은 영화를 감상하면서 이런 일련의 질문들에 대한 감독의 성찰을 함께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성찰의 중심에는 보복은 연속적인 보복 행위로 이어질 뿐이며, 비록 용서하고 또 보복하지 않는 일이 어렵다고 해도 반드시 실천되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에서 살기 위함이라는 신념이 자리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상처와 관련해서 감독은 용서가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용기임을 강조한 것이다.
상처와 관련해서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용기는 바로 용서라는 영화적인 메시지에 덧붙일 만한 것이 없다고 여겨지지만, 추가적으로 상처 자체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헨리 나우웬은 “상처 입은 치유자”란 제목의 글에서 상처는 사역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역자는 자신이 사는 시대가 처한 고통을 마음으로 깨닫고, 그 깨달음과 함께 사역이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사역자의 진정성 있는 삶을 통해 겪게 된 고통을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사역자는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본 것이다.

치유, 새로운 창조
앞서 제기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즉,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가? 서양 의학에서는 문제의 근원을 찾아서 도려내거나 문제의 원인이 되는 박테리아를 찾아서 제거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지만, 동양 의학에서는 주로 보강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신체의 다른 부위나 연관이 있는 부위를 강화함으로써 면역력을 키워 몸 스스로가 치료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상처를 직면하게 함으로써 해결할 수도 있지만, 더욱 큰 고통을 참을 수 없다면 쉬운 일은 아니다. 헨리 나우웬은 상처를 치유하는 지도자의 원칙을 성찰하면서 상처를 치유하는 한 방법으로 환대를 제시했다. 왜냐하면 환대는 타인에게 집중하는 일이며, 타인이 자기 안에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일이기 때문에 상처 받은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로부터 환대를 받은 상처 입은 자들은 자신의 상태를 편하게 직면할 수 있고 또 빈 공간에 머물면서 상처의 원인을 파악하고, 또 상처가 단지 고통과 슬픔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 여행을 지속하도록 해주는 표시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에 따르면 상처의 본질은 고통과 슬픔, 혹은 외로움이 아니다. 나우웬에 따르면, 상처는 오히려 잘못된 가정, 곧 자신에게 고통이나 두려움, 혹은 고독이나 혼란, 그리고 회의가 전혀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오히려 깨어지기 쉬운 존재이며, 고통과 슬픔 등은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 속에 있는 일이다. 가족 혹은 교회 혹은 친구들의 모임 등. 상처는 공동체 속에서 서로 공유될 때 위로와 함께 새로운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나우웬은 지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상처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시는 장소일 수 있다고 말한다. 매우 옳은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필자가 생각하기에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하나님의 위로에 의지하며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이다. 복수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위로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진심으로 위로를 구하고 또 하나님을 소망할 때, 상처를 준 자에 대한 용서를 기도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될 때 상처는 단순히 망각되지 않고 깨끗하게 아물게 된다. 글 최성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