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한 새벽, 멀리서 야간 서치라이트가 강기슭 쪽으로 다가온다. 한 남자가 웅크리고 앉아 숨죽이며 주위를 살핀다. 이내 불빛이 사라지자 남자는 강 쪽으로 냅다 내달린다. 그러자 사라졌던 지옥의 눈과 같은 불빛이 발광하며 좇아온다. 라이트가 앙각(low angle shot)으로 겁에 질린 남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춘 화면이 클로즈업된다. 여기까지는 흔히 탈북자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익히 봤던 관습적인 장면 중에 하나이자 몇 해 전에 이러한 소재로 영화를 기획하던 내 시나리오의 첫 부분이다.
<무산일기>는 이러한 북한 탈출 과정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아예 이러한 이야기 자체가 없다. 영화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머리가 125로 시작하는 한 탈북 청년이 대한민국사회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담담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감독이기도 한 박정범이 분한 주인공 승철과 그의 친구 경철은 탈북자다. 다른 여타 동남아시아나 중국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처럼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기피하는 3D 일을 대신해주고 돈을 벌어 먹고 살고 있다. 이는 영화사적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봐도 한국 사회가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이라는 개념의 ‘탈북자’에서 ‘이주 노동자’로 변했음을 의미한다. <무산일기>는 이들이 한국에서 겪는 타자인 삶의 감정 혹은 질곡에 더 충실하다. 벽보 붙이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리는 탈북자 승철과 동료 탈북자들을 사기 치는 경철, 그리고 교회 성가 대원이자 아버지 노래방 일을 돕는 숙영, 이들 3명의 캐릭터가 이야기의 축이다. 승철과 숙영의 관계는 한국 사회가 타자인 승철을 대하
는 모습이고, 승철과 경철의 관계는 고향을 등지고 온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살아가는 현실의 반영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들이 관계하고 소통하는 공간이자 한국 사회가 이방인으로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하루 벌어먹고 사는 승철의 유일한 낙은 같은 교회를 다니지만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숙영을 보러 교회에 가는 거다. 그런 승철이 숙영과 같은 노래방에 취직을 하지만 이내 교회에서 승철을 목격하고 만 숙영은 여간 불편하지 않다. 승철은 남한에서 살고 있지만 결코 섞일 수 없는 탈북자 콤플렉스, 그리고 숙영은 교회 활동도 열심이지만 노래방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는, 둘 모두 주변인 일 수 밖에 없다. 한편 승철이와 같이 북한에서 넘어온 경철은 같은 동료 탈북자들이 번 돈을 고향으로 보내주는 자본주의에 철저한 중간 브로커다. 승철은 경철이 정당하지 않은 이런 모습을 정죄하며 자신은 그와 다르다고 여긴다. 그런 승철이 자신이 하는 벽보를 붙이는 일을 선점한 남한 토박이 양아치들의 득세에 쫓겨 서울 도심의 재개발지구로 도망쳤을 때 다다른 곳은 헐린 집 대문이다.
밑은 바로 낭떠러지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들고찍기(hand held)로 승철의 등 뒤에서 그를 좇는다. 이는 이창동 감독 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떨어져서 바라보기’와 같다. 무심하게 여러 인물을 잡아내는 관조적 앵글로 관객이 극에 완전히 몰입하지 않고 극중 배우들과 떨어져 보게 하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관객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박정범 감독이 자신의 멘토와 다른 지점은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승철은 비록 마지막 엔딩에서 그의 도덕성을 저버리는 행위를 하지만, 이전에 참여했던 교회의 기도 모임에서 자신이 북한에서 저지른 행위를 고백한다. 숙영은 그런 승철을 보듬는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이들에게 다가가는 커뮤니티가 바로 교회라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승철이의 지극히 사변적 내러티브가 이토록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은 자신의 삶이 곧 한국사회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소재적인 관점에서 탈북자에서 이주노동자로 이동은 여기에서 살아가는 모든 소외된 자가 사회와 소통하는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교회에 발을 딛고 있지만 때로는 위선적인 숙영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비관적이지 않다. 실제 나의 모습은 현실의 고통에 눈을 감기도 하고 변 명으로 일관하다가도 교회에서는 회개한다. 때론 멀어지고 다시 그분께 다가가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해하는 바는 오직 하나이다. 그렇게 숙영은 승철을 감싸 안는다.

조현기|세계 최고의 독립영화제로 불리는 선덴스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자리에 커다란 백팩을 등에 매고 찾아갈 정도의 열정을 지녔지만 지금은 다이소 쇼핑 마니아이자 기아타이거즈의 열혈 팬이다. 영화를 통해 소통을 꿈꾸는 서울기독교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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