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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고전으로 오늘을 읽다

절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l 키르케고르의<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이 옛말에는 숨은 속뜻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개똥밭’이라는 진실말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산다는 것은 ‘죽을 것 같이’ 힘들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할만큼 ‘드으~럽게’ 힘이 듭니다. 힘 있는 사람이나 돈있는 사람, 빽 있는 사람, 인기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승에서 산다는 것이 마냥 쉽고, 그냥 좋을 수만 없습니다. 그러니 그토록 유력했던 정치인도 자살하고, 그토록 유명했던 연예인도 자살하는 것이겠지요.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만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이 무 많은 사람도 자살합니다. 이렇게 부조리한 상황을 떻게 파악해야 할까요?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라
면,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걸렸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해줄 것 같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잘 알려진 대로 ‘절망’에 대한 은유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절망하는 것은 어떤 일에 대해서, 어
떤 조건에 대해서가 아닙니다. 절망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입니다. 여자든 남자든, 빈자나 부자나 절망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요. “절망하는 자가 무슨 일에 대해 절망했다는 것은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한 것이다” (<불안의 개념/죽음에 이르는 병>, 동서문화사, 192). 꽃밭에서 뛰노는 것이 저 세상이고 본질이고 종합이라면, 아무리 애써도 개똥밭에서 구를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이고 실존이고 절망입니다. 그런데 절망할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오히려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인간이 동물보다 뛰어나다는 증거”(187)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정신’이고, 정신은 ‘자기’이고, 자기는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입니다(185). 한 마디로, 사람은 ‘종합’이며 ‘관계’입니다. ‘무한과 유한의 종합’ 또는 ‘자유와 필연의 관계’인 사람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세계여행을 하며 여행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겨우 88만원의 임금을 받는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필연입니다. 돈을 아끼고 아껴서 세계 여행에 필요한 디지털 카메라를 사는 것은 나름대로 자유와 필연을 종합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세계 여행 경비를 마련하지 못하는 것은 절망이고, 좌절이지요. 이렇게 어떤 식으로든 종합을 실행한 사람만 절망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절망은 ‘잘못된 관계’이며 ‘분열된 종합’입니다. 절망은 그래서 병과 같고 죄와 같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절망의 형태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첫째가 ‘절망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가장 심각한 상태입니다. “만일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다만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일 뿐, 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의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야말로 절망하고 있는 것이 된다.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절망하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즉, 절망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개입된 것)의 부정이어야 한다. 만일 어떤 인간이 절망해 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는 절망의 가능성을 모든 순간에 부정하고 있어야 한다”(187). 둘째는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인데, 이 또한 두 가지 형식으로 나뉩니다. 절망의 1형식은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아니고자 하는 상태(나약함)’입니다.
“자기에 대해 절망한다는 것, 절망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것이 모든 절망의 공식” 입니다(193). 절망의 2형식은 ‘절망하며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상태(반항)’입니다. “그의 절망을 방해하는, 그의 절망을 방해하려는 시도를 하는 그 어떠한 사람 혹은 그 어떠한 것이든 저주하는”(214) 상태로, 한 마디로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께 도움 받는 것을 거절하며, 불행에 빠져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면 절망은 갑절이나 증가하고, 절망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체념하면 절망은 제곱으로 강화됩니다. 이러한 절망은 바울의 탄식과 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21-24, 새번역) 이 절망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일까요?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 힘만으로 종합의 변증법적 균형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노력으로는 절망에서, 절망이 강화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지요. 그 대신에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자기 자신을 관계짓는 것만 절망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신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고, 따라서 모든 순간에도 진리다”(213). 하나님의 신뢰하는 것, 우리를 성립케하는 힘에 의지하는 것,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절망을 해독하는 방법입니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지금 절망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가장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절망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이 구원에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스스로는 절망하고 있다고 아무런 가장도 하지 않고 솔직히 말하는 사람 쪽이 자신은 절망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보다도 변증법적으로는 한 걸음 더 구원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201).‘ 나는 절망하고 있다, 나는 절망하고 있다’라고 한번 말해봅시다.‘ 여기는 개똥밭이다, 개똥밭이다’라고 말하며 절망해봅시다. 오직 그런 사람에게만 구원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절망의 대립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기 때문이지요. “믿는 자는 어떻게 해서 자기가 구원될 것이냐 하는 것을 완전히 신에게 맡긴다. 그리고 신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215). 절망을 인식하지 못하는 믿음, 절망을 인정하지 못하는 희망, 절망을 인내하지 못하는 사랑은 개똥같은 것 이지요. 우리는 이 개똥밭에서 용기를 내어서 절망합시다! 절망하고 그리하여 신앙하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며 절망의 시대를 지날 때, 하이데거나 사르트르, 마르셀, 데리다, 레비나스와 같은 철학의 거장들, 칼 바르트나 폴 틸리히와 같은 신학의 거목들은 키르케고르에게 영감을 얻고 영향을 받으며 새로운 도약을 시작하였습니다. 그토록 위대한 Søren Aabye Kierkegaard라는 그의 이름은 어떻게 불러야 맞는 것일까요? ‘키에르케고어’라는 이름을 정식화한 한국 키에르케고어학회가 있긴 하지만, 대다수의 철학 서적에서는 ‘쇠얀 키르케고르’라는 이름을 널리 쓰는 것 같습니다. 키르케고르는 다양한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곤 했는데요. 독자들이 저자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해석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원래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안티-클리마쿠스Anti - Climacus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지요. 글 이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