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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뉴스 따라잡기

기상 이변이란 말 뒤로 숨지 마세요

비오는 날씨가 낭만적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비 내리는 날이면 누군가와 한 우산 쓰고 걷는 상상에 설레기도 하고, 자동차 유리창에 떨어지는 비를 보며 ‘kiss the rain’이나 ‘비오는 거리’ 같은 낭만적인 노래를 떠올리기도 했던 시절 말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습니다. 수해 현장으로 출동해야 하는 사회부 기자만 비가 무서웠던 건 아니었을 겁니다. 올여름 거리에서 비를 맞아보신 분이라면, 뉴스에서 우면산 산사태에 휩쓸린 강남 아파트와 수해 입은 사람들을 보신 분이라면 아마 비슷한 감정을 느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천재지변’,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구 온난화 때
문에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 거고, 따라서 올해 비때문에 입은 피해는 ‘천재’라는 서울시의 설명이 아예 틀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 서울에 하루 동안무려 300mm 넘는 폭우가 쏟아진 날도 있었으니까요. 한반도 연안의 수온은 1969년에서 2004년 사이 1.1도 올랐습니다. 0.5도인 지구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수치입니다. 굳이 이런 숫자를 늘어놓지 않더라도, 점점 기상 ‘이변’이 잦다는 건 체감하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기상 이변이 잦다는 말은, 더 이상 이런 상황이 ‘이변’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난해 태풍 ‘곤파스’가 몰려왔을 당시에도 올해처럼 광화문을 비롯한 도심은 물에 잠겼습니다. 작년에도 우면산에서는 나무 3천5백여 그루가 뿌리째 뽑혔습니다. 올해만 이런 피해가 있었던 게 아니라, 불과 1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얘기입니다. 게다가 서울시는 툭하면 ‘백 년만의 폭우’라는 말을 쓰는데, 하루 강우량으로 따지자면 올해(301.5mm)보다 비가 더 온 날이 지난 98년(332.8mm)을 비롯해 과거에 2번 더 있었고, 시간당 강우량을 살펴보면 올해보다 심한 적이 이미 여러 번 있었습니다.

돈 쓰는 곳에 마음도 쓰는 법
서울시는, 지금 시장이 자
리에 있는 동안 수도 서울을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겠다며 ‘디자인 서울’ 계획을 빠르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울시 신청사를 짓는데 3천억 원, 동대문 디자인플라자를 세우는데 4천2백억 원, 한강변에 공원을 만드는 한강르네상스 사업에 5천4백억 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지난해 소위 ‘물폭탄’을 맞은 뒤 3백2 십억 원을 들여 진행하던 서울 광화문 침수방지 공사는 아직도 마무리 되지 않았고, 그 사이 도심은 또 한 번 물에 잠겼습니다. 지난해 폭우로 3천5백 그루를 잃은 우면산에는 고작 1천 그루만 새로 심었을 뿐이죠. 올 여름 바로 그곳에서 산사태로 인명피해가 났던 겁니다.

‘이변’ 얘기 다시는 듣지 않기를
사회부 기자들은 비
가 많이 온다는 예보가 나오면 늘 긴장하며 기상청에 전화를 겁니다. 그런데 ‘기상 이변’ 때문에 기상청이 예측을 잘 못했다고 욕먹는 일이 잦다 보니, 기상청의 태도가 예전과는 좀 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무조건 ‘많이 올 것 같으니 피해에 조심하라’는 식으로 바뀐 것 같다는 말입니다. 기상청의 역할은, 욕먹는 것이 두려워서 그저 적극적인 예보를 하는 게 아니라 예보를 듣는 사람들을 위해 더 정확한 예측을 하는 것입니다. 피해를 예측하고 대비하라며 뽑아놓은 사람들이 ‘기상이변’과 ‘천재지변’이라는 말 뒤에 숨어버리면 시민들은 할 말이 없습니다. 아마 이런 추세라면 당장 올 겨울에도 눈이 많이 오고 다음 여름에도 비가 많이 올 텐데... 그때는 또 ‘이변’이라는 얘기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조현용|커다란 머리만큼이나 세상의 아픔을 돌아보고 알리고 싶은 MBC 기자. 사실 부지런하기보다는 게으르고 한곳에 머무르기보다는 여러 나라를 개 마냥 싸돌아다니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하고, 화려한 밥상보다 오직 맛있는 연유가 들어간 모카빵을 좋아하는, 크리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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