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을 읽다/고전으로 오늘을 읽다

일생동안 읽을 한 권의 책 l 함석헌의<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다

 

우리가 어떤 책을 읽었노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 책을
얼마나 읽어야 할까요? 한 페이지도 빠뜨리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며 챙겨보았다면 되는 것일까요? 분명히 읽긴 읽었지만, 도통 기억나는 것이 없는 경우는 어떨까요? 아니면 읽은 지 무척 오래되었어도 전체적인 줄거리를 요약할 수 있는 경우나 인상 깊은 두세 문장을 암기할 수 있는 경우는요? 프랑스문학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피에르 바야르는 베스트셀러가 된 저서인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독서와 비독서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독서는 각 사람마다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여러 가지 다른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세상에 책은 무척 많고 좋은 책도 너무 많
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능력에 한계가 있기에, 좋은 책이라고 해서 모조리 다 읽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수십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수만 권의 책을 섭렵한 다독가라 하더라도 매일 새롭게 넓어지고 깊어지는 책의 바다에서는 읽은 책보다도 읽지 않은 책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일 분을 투자하는 것도 아까운 책이 있는 반면에, 일주일 내내 몰입하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어떤 책은 일평생 읽을 만한 책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책이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독서가 그렇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책을 읽는다는 것은아마 ‘초월’의 경험에 가까운 것입니다.
오랜 세월에 거쳐 많은 사람에게 이러한 초월을 가능케 하는 독서 경험을 제공하는 책을 ‘고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굳이 읽어야 한다면 고전을 읽어야 하겠고, 남의 고전이 아니라 우리의 고전을 읽으면 더 좋겠지요. 그리고 20세기 우리나라, 한국 기독교에도 서양기독교 고전에 전혀 뒤지지 않는 위대한 책 한 권을 서슴없이 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민족의 큰 스승인 함석헌 선생이 쓰신 <뜻으로 본 한국역사>입니다.

인생을 넘어뛴 자리에서 참인생을 볼 수 있듯이 역사를 넘어뛴 자리에서야 참역사를 볼 수 있다. 이런 사관 없이 쓴 역사는 참역사가 아니요, 이런 사관에 이르지 못한 역사 공부 또한 참역사의 읽음이 아니다. 이러한 사관은 그것을 가진 후에야 역사를 알 수 있고, 또 역사를 읽어서만 거기에 이를 수 있다(<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47쪽).

불안한 시대, 불의한 세상에서 우리는 의미를 찾기가 힘듭니다. 강력한 현실의 권력은 무자비하고, 연약한 우리의 노력은 무의미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뜻은 있습니다. 물론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새로운 관점을 획득해야 합니다. 오늘을 바로보기 위해서는 오늘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절망스러운 현재에 함몰되지 않고, 현재를 뛰어넘은 지점에 설 수 있을 때에야 현재의 참된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세계적이니 뭐니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일종의 사치요, 주제넘은 생각 같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살았다 함은 할 일이 있다는 말이다. 생生은 명命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이 삶이다. 삶은 함이다. 괴테의 말과 같이“ 쓸데없는 존재는 죽음의 존재다.” 사명에 대해 믿는 바가 없이는 생존권을 주장할 자격이 없다. 어떠니 한국 사람도 살아야겠다는 것이며, 어떠니 우리에게도 자유를 달라는 것인가? 한국 사람이 만일 그 생존권을 주장하고 그 자유를 요구하려면 그는 운명을 같이하는 인류 앞에서 그 무대에 올라가 한 가지로 맡아 할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471쪽).

함석헌 선생은 이 책에서 고난으로 점철된 우리 역사를 바라봅니다. 똑같은 책을 보고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수준의 독서를 하듯이, 함석헌 선생은 동일한 한국 역사라는 텍스트를 보고 남다르게 역사적 의미를 읽어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발붙이고 살아있는 분명한‘ 뜻’을 밝혀냅니다. 우리가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위대한‘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불의의 결과가 우리에게 지워졌으니, 우리가 만일 그것을 깨끗이 씻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은 할 자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이다. 사명은 우리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 그러므로 한국, 인도, 유대, 흑인 이들이 그 덮어 누르는 불의 고난에서 이기고 나와서, 제 노릇을 하면 인류는 구원을 얻는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이 세계는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이 물질의 종 아닌 것이 우리에 의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권력이 정의 아닌 것, 종내 그것이 이기지 못하는 것이 우리로 증명되어야 한다. 불의의 세력이 결코 인생을 멸망시키지 못하는 것이 우리로 인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사랑으로써 사탄을 이기고 고난당함으로 인류를 구한다는 말이 거짓 아님을 증거하여야 하고, 죄는 용서함으로만 없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천하 앞에 증거하여야 한다. 온 인류의 운명이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483쪽).

초월을 가능케 하는 독서는 단지 우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재를 뛰어넘고 역사를 앞질러나가 다가올 미래에서, 영원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함석헌 선생은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상황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영원의 렌즈, 즉 하나님의 눈을 통해서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도 위대한 사유가 담긴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으며 절망스러운 시대를 돌파할 지혜와 용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새롭게 시작하고자 한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일생 동안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무의미한 오늘에서도 참된 의미를 발견하고, 절망적인 오늘에서도 참된 희망을 발굴할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입니다.

글 이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