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선 성탄을 맞아 행사 준비가 한창이다. 선생님의 배려로 연극에 참여하게 된 덕구는 말도 더듬고 지능도 낮아 대사를 외우는 데 힘이 들지만, 온 힘을 다해 준비한다. 함께 연극을 준비하는 아이들은 덕구 때문에 연극이 망칠까 봐 불만하다. 공연 당일, 덕구가 마리아와 요셉에게 빈방이 없다고 매몰차게 거절해야 하는 장면에서 빈방이 있다고 말하는 바람에, 공연은 중단되고 관객과 배우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그런데 우리의 ‘덕구’는 왜, 빈방이 있다고 말했을까? 올해로 31년째, 연극 <빈방 있습니까?(이하 빈방)>에서 ‘덕구’를 연기하고 있는 박재련 장로(동숭교회)를 만났다.  글 원유진 · 사진 제공 박재련

 

“우리 학교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에 찾아온 손님들에게는 내가  언제나 차를 대접합니다.” 환하게 웃으시며 차를 직접 만들어 주시고, 통화를 끝내고 자리에 앉으면 다시 전화벨이 울려 일어서는 와중에도 바빠서 미안하다고 말씀해주시는 모습이 낯설다. 교장이라는 직함이 주는 권위적이고 경직된 느낌은 어디에도 없다. 어딘지 모르게 풀어진 분위기를 이상하다고 느낄 즈음, 이유를 알았다‘. 덕구’ 때문이었다



 


덕구가 있었다.


<빈방> 초연부터 참여한 박재련은 처음에는 ‘덕구’ 를 실감나게 표현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 관객들이 실제로 말을 더듬고, 지적장애가 있는 줄 알았다고 말해줄 때마다 자신감이 커졌다. 자신의연기력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자신이 고민하게 되는 것은 실제적인 표현이 아닌, 삶이었다“. 어떻게 하면 덕구를 닮아갈 수 있을까, 덕구처럼 나를 비울 수 있을까.” 자꾸만 무엇을 채우려고 하는 허기진 세상에서 덕구는 자신의 자리를 내어준다. 방을 비워놓고 그분을 모셔 쉴 수 있게 하고 싶다. 남들에겐 모자라서 웃는 가상의‘ 덕구’지만, 박재련에게는 ‘ 예수님과 가장 가까워서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다.
덕구는 30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어리고 모자란 모습이지만, 덕구를 연기하는 박재련은 변했다. 30년의 나이를 먹어 어느덧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다. 사회적인 위치도, 머리의 색도, 마음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 변화의 중간엔 언제나 덕구가 있었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덕구의 대사가 생각나 대사를 읊어보고 그 말을 하는 덕구를 떠올렸다. 생활 속에서 덕구는 살아서 박재련에게 영향을 끼쳤다“. 자꾸 달라지지요, 우선 내 인생, 성격, 성품이. 제가 모든 면에서 자신만만하고 직설적이고 그랬어요. 날카롭다고 해야 할까, 어떤 일에 몰입하면 신경질적이었는데, 나이 탓도 있지만‘, 덕구’라는 인물이 나도 모르게 내 삶에 들어와 둥그러진 것 같아요.”
연극에서 덕구는 단순히 빈방이 있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관객이 떠난 빈 무대 위에서 덕구는 연극을 망친 이유를 가지고 기도 한다. 자신의 방을 비워 예수님이 마구간같이 찬 곳이 아닌 따뜻한 곳에서 태어나기를 바란다. 예수님이기 때문에, 내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이런 덕구의 고백은 자연스레 박재련의 삶이 되었다.
“덕구만 생각하면 눈가가 젖어들고,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지요.” 덕구를 말하는 박재련의 눈시울이 붉다. 덕구의 기도를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흐르는 박재련은 대사 중에 울음이 터져 나와 연출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연극은 배우가 아닌 관객을 위한 것이라 덕구의 대사에 관객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데, 덕구가 먼저 울어 버리면 관객이 들어갈 틈이 사라져 함께 울 수 없다는 게 연출의 생각이고, 또 무대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관습이다.
하지만 북받쳐 오르는 눈물이 참는다고 해서 참아지던가. 진심을 담은 그의 울음은 관객과 연출 모두에게 감동을 줬다. 진정이 관습을 뛰어넘은 것이다. 이에 대해 박재련은 단순한 연극이 아니라 예배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내가 연극 망쳐 놨어요.
그치만 어떻게 고짓말을 해요.
우리 집엔 빈 바이 있걸랑요.
근데 어떻게 예수님을
마구간에서 나라구 그래요.
난 정말 에수님이 우리 집에서
태어났으면 좋겠다 생각했거든요.
얼마나 신나요!
그럼요, 난 내 방 비워 놨을 거예요.
난 에수님이 좋아요.
에수님. 사랑해요.
에수님이 최고에요.
에수님은
내 죄 땜에 죽으셨잖아요.



 


연극은 예배다

박재련이 대표로 있는 극단‘ 증언’은 유랑극단이다. 부르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가서 연극을 한다. 무대가 없어도, 음향, 조명 시설이 없어도 상관없다.“ 서울역에서 주일 낮 2시에 노숙인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목사님이 계시는데, 거기서도 연극을 했어요. 여기서 어떻게 연극을 하느냐 싶겠지만, 우리는 예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할 수 있거든.”
이어 박재련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헌신’이라고 말한다. 몸과 마음을 바쳐 결국 남을 위한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장소와 조건을 따지지 않고, 연극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있는 것이다. 또한 연극은 배우가 한 명뿐인 작품이라도 결코 혼자서는 만들어낼 수 없다. 사람이 모여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조화를 이룰 때 작품이 만들어진다.“ 배우가 특출나게 잘하면 그 사람은 찬사를 받을지 몰라도 공연 자체는 소외되거든요.” 좋은 작품을 위해 시작한 배려는 결국 나에게 돌아오게 마련이다.
교장이며 연극을 하는 선배인 박재련은 공연예술을 전공으로 하는 아이들이 연극·뮤지컬·밴드 공연을 통해 어우러짐과 배려를 배우길 바란다.“ TV에서 서로 튀려고 하지만, 한 사람이 지나치면 균형이 깨지는 거거든. 우리는 웃고 보지만 그 속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거든요. 우리 아이들도 남을 배려하고 융화할 수 있는 걸 배웠으면 좋겠어요.” 남을 위한 자리에 대해 말하는 박재련의 얼굴 위로 빈방이 있다며 가려는 요셉을 붙잡던 덕구가 겹친다.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빈틈없이 뭐든 채우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방을 비워 내어주는 덕구를 보여주어 ‘망치로 얻어맞는 충격’을 주고 싶다는 박재련 장로. 이번 겨울에도 어김없이 찾아올‘덕구’는 또 어떻게 새로워져 있을까.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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