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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도시에 사는 붕대부부

 

지팡이도 심으면 움이 튼다는 봄이다. 그러나 내가 사는 이곳은 바닷가라 유독 바람이 많다. 봄의 문턱, 파도가 넘실거리듯 바람이 춤을 춘다. 바람의 도시다. 이 도시에서 결혼한 지 4년째다. 바람과 친숙해지느라 몇 차례의 혹독한 감기와 씨름을 했다. 그래서 봄을 입고 베란다 창으로 비집고 들어선 햇살이 반갑다. 작은 화분에 연두 새순이 새끼제비 입모양을 하고 비집고 나온다. 가슴이 벅차다. 사람들은 고작 작은 화초를 보고 그런 과장을 하느냐고 하겠지만 내게는 황홀하리만큼 감사하고 설렌다. 긴 겨울같았던 암과의 투병생활, 그리고 장애로 휠체어를 타는 불편한 몸이지만 나무에 움트는 새순은 나에게 기쁨을 선물했다.

나는 지금 오른쪽 손톱에서부터 어깨까지 8겹의 붕대를 감고 컴퓨터 자판을 더듬거린다. 유방암 수술의 후유증으로 림프부종이 생겨서 매일 붕대를 감고 생활해야 한다. 매일 출근하기 전 남편은 부종으로 심하게 부은 나의 팔에 붕대를 감아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암과 장애를 지닌 것을 알고도 결혼한 남자, 그리고 날마다 부은 팔에 붕대를 감아주는 남자다. 처음 붕대를 감고 한동안 남편이 출근한 뒤 홀로 하루를 보내는 것은 바람의 도시로 이사 와서 몇 해 동안 감기를 달고 산 것처럼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흔쾌히 바람이 강한 봄을 맞듯 나의 팔에도 어느 덧 봄이 찾아 왔다. 감기보다 강한 것은 봄의 생명력이다. 불편한 붕대보다 강한 것은 남편의 사랑이다. 이제 남편이 날마다 감아주는 것은 붕대가 아니라 아내의 허물과 아픔을 덮는 사랑이다. 그 사랑을 오른손 가득히 감고 집에 홀로 남아서 느리게 하루를 살아간다. 느릿느릿 한 손으로 휠체어를 타고 느릿느릿 한 손으로  남편의 저녁을 준비한다. 그러나 누가 이 느림의 행복을 알까? 어느덧 몇 겹의 붕대로 고목나무처럼 묵직해진 오른팔 위로 새로운 사랑의 싹이 튼다.



이정연|류마티스와 유방암과 싸우지만 오늘도 믿음과 소망으로 살아내는 여자이자, 목사의 아내. 수필집 <내 한 쪽 가슴에 핀 꽃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