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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김준영의 페북 친구

최연하 사진전시 독립큐레이터


소셜네트워킹서비스 트위터 리트윗과 속도감이 주는 즐거움보다 140자 제한에 아쉬움을 더 크게 느끼다 실증이 날 때쯤 페이스북이라는 좀 더 이용자가 유연하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재미에 빠져 지낸 지 2년째. 참 신기하게도 실제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와 내가 그 무엇엔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 요즘은 꽤 자주 하루의 일상을 친구들에게 공개한다. 누구는 왜 그런 사소하고 개인적인 것까지 공개하느냐고 의아해 하지만, 내겐 온라인이라는 연망으로 알고 지내는 애매모호한 친구가 하루를 뉴스피드로 올리거나 나의 글에 ‘좋아요’ 와 댓글을 달아 줄 때면 긴긴 추운 겨울 외로운 이밤을 차디찬 침대에 웅크려 잠만 자는 가장 쉬운 노총각의 구질구질한 습관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소하지만 꽤 중요한 임팩트다.

그러던 즈음에 ‘흠, 실제 내 친구들을 만나보면 어떨까, 그리고 그들을 인터뷰해본다면.’ 그들과 잠시나마 오프라인에서 만나 그 이야기를 싣는다면 짜릿하겠단 생각이 났다.
 
입춘 2틀 전, 갑자기 떨어진 기온에 나름 옷을 든든히 차려 입고 대학로에서 그녀를 만나기로했다. 대학로에서 여자를 단둘이 만난 적이 그 얼마만이던가. 그 사실이 가슴에 와 닿으니 꽤 설레기까지 했다. 글·사진 김준영

날이 많이 추워요. 아르코미술관에는 처음이에요.
전 별로 안 추운데요. 옷을 얇게 입고 다니니까 춥죠. 여긴 나라에서 운영하는 곳이에요. 우리가 낸 세금으로 운영하는 곳이니 만큼 자주 들락날락하며 활용을 해야 해요. <비밀 오차의 범위> 전시 보고 있었어요. 아르코미술관에서 현재 하고 있는 전시인데요. 지역 미술관과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새로운 작가들의 이슈나, 지역 작가들의 이슈를 교류하는 전시예요. 지역 작가들이 일명 중앙이라고 일컫는 서울에 진출하기가 힘들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연결해서 전시를 해요. 재미있는 전시죠. (아르코미술관 2층엔 큰 창이 있다. 그 창으로 비치는 겨울의 지는 햇빛이 내 얼굴을 때린다. 순간 얼굴이 찌부려 지는데) 저쪽으로 갈까요? (한사코 사양했지만 사실 눈뜨기는 쉽지 않았다.)

페이스북 정보에 종교관에서 밝혔던데요. 영성이 충만한 일상이 주는 매력은 뭘까요?
저는 원래 종교적이에요. 저희 큰 오빠도 교회에서 성가댄가요, 지휘도 하시고요. 그런데 믿음은 있지만, 살다 보면 영성이 부족한 사람을 많이 만나 봤어요. 종교인들 중에도요. 외적으로 형식적인 종교적 공간에 나간다거나 어떤 대상에게 나아가는 사람들은 많은데, 삶이 종교적이거나 영성이 충만하다고 느낀 사람은 많이 못봤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을 보면 종교를 가늠해 보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충만한 영성으로 사는 사람에게 끌림을 느껴요. 영성이 깃들어 있는 사람이죠. 일상에서 감사, 나눔, 함께하고, 연대하고, 공존하고 손을 맞잡아서 좀 더 괜찮은 세상을 위한다면 저는 그게 종교적인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 안에서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뜨거움을 맛보고 살아간다면, 그게 일상의 영성 아닐까요? 정말 매력적이잖아요. 그렇게 하기도 힘들고요. 

예술 연구하다 보면 종교로 가시는 분들 꽤 많던데 말이죠. 
맞아요. 그리고 사실은 예술사, 사회학을 공부하시는 분들의 뿌리가 종교학에서부터 시작을 하더라구요. 종교학을 하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으니까, 일부러 종교학을 전공하고 나서 아트 쪽 일을 하거나 생산자, 혹은 향유자가 되기도 하구요. 
 
런 점에서 어떤 일을 주로 하시나요.
페이스북에서 ‘전시순례’ 그룹을 만들어서 작게나마 활동하고 있어요. 사실 전시에 가고는 싶은데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상례적으로 전시 투어를 열며 돈을 받고 하는 사람은 많아요. 근데 돈을 내면서까지 전시장에 가려고 하는 사람은 이미 미술, 사진에 흥미와 지식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죠. 그들이야 알아서 가죠. 그런데 보통사람들이 ‘어 이거 뭐지?’하며 사진에 친숙하고 일상에서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페이스북을 통해 그룹을 만든 거죠. 
근데 생각한 것보다 일이 더 많더라구요. 대가를 주거나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미술, 사진, 예술 작품을 통해 서로 나누면 좋겠다 싶어 한 건데 말이죠. 전시 특성상 영화와 달라서 개방 시간도 길고, 기간도 길어서 꽤 많은 사람이 함께 몰려 다니며 보기는 좀 그래요. 그렇지만 함께한다는 것이 의미도 있고, 제가 도움을 주고, 또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냥 즐기는 정도로 하고 있어요. 희생한다는 느낌 들면 재미 없으니까.
 

꽤 재미 있는 호칭이 따라다니시던데, 독립큐레이터는 뭐죠?
일명 자영업자인 셈이죠. 어디 소속되어 있지 않고, 뮤지엄이나 갤러리 공간에서 작품 판매 목적을 위한다거나, 이슈 생산, 즉 콜랙선을 목적으로 한다거나 하는 것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거죠. 미술사적, 미학적,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을 기획해서 전시를 하죠. 뭐, 여하간 영리를 목적으로 하든, 이슈 생산을 목적으로 하든 독립큐레이터 같은 경우는 그런 미술관과 갤러리와 평론가와 콜렉터들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해주는 동시에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생산해 내고, 그리고 작가들과 친분을 더 원할하게 해서 뭔가 좋은 것을 도모할 수 있다고나 할까요. 그 일을 하는 거예요.
 
독립이라, 참 흥미 있는 단어이기도 하고 또 개념 자체를 정확하게 규정하기도 어렵겠어요. 어디서 독립이냐 하는 부분에서 말이죠.
그렇죠. 과연 어디에서 독립이냐? 그리고 그 독립의 의미가 뭐냐며 비아냥의 대상이 될 수도 있어요. 일군의 갤러리나 미술관의 중심으로 움직이는 스승과 제자들의 인맥에서 독립이냐, 소속이 혼자한다고 부를 호칭이 없으니까 독립이냐 등 꽤 질문한 여지를 주죠.
 
뭔가 매력적인데 배고플 것은 어느 정도 각오해야겠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배가 고파야 하는 건가…
하하,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죠. 자본이 취약하고 공간이 없으니까, 게다가 자기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그 무엇이 별로 없으니까 좀 힘들죠. 그래도 저는 사진 전시를 전문으로 일하며 때를 잘 만났다고나 할까요. 기관에서 의뢰를 하거나 지원금을 받기도 하고요. 제가 생각하는 생태나 환경 부분이나 다큐멘터리 부분이 우리나라에서 꽤 취약한데, 제가 제 돈을 들여서라도 전시를 하고, 국가에서 관심도 있는 부분이니까 그 기금을 받아서 하기도 하고요.

그것만으로는 힘들 것 같은데요. 결국 밥을 무시할 수 없고. 게다가 독립큐레이터가 원하는 이슈 생산이랄까요, 그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차비가 필요할 텐데요.
음, 저는 사진 전시 쪽 독립큐레이터니까, 사진계에 이슈를 던지는 게 제 목표이고, 그러한 담론을 생산하는 것이 제 꿈이기도 해요. 궁극적으로 그런 담론을 생산해 내려면 작가에 대한 이해도 높아야 하고, 작가 작품에 대한 연구도 선행을 해야 하고, 그 연구를 위한 기반도 필요할 테고. 비평, 글쓰기 강해가 제 목표로 가기 위한 약간의 차비를 마련해 주죠. 큐레이터도 생산자 입장이니까, 뭔가 작업을 만들어서 PD처럼 기획을 해야 하는 거니까, 만들어 내야 하는 거니까. 그런데 생산만 해 나갈 수 없으니까, 비평 등의 일을 수반하는 거죠. 물론 인생이 짧으니까 지금 하려는 일을 돈 벌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죠. 지속할 수 있는 내성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포장을 많이 한 채 브라운관에서 다룬 직업 중 하나가 큐레이터인데, 정말 멋있기도 하지만, 생산자 입장이면 그리 편하지만 않겠군요.
힘들어요. 드라마 등에서 큐레이터에 환상을 많이 덧입혔지요. 사진작가에 대한 환상처럼요.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 현실은 힘들고 특히 영세한 부분도 꽤 있죠. 재미있게도 대부분 지원하고자 하는 분들은 엘리트들이죠. 유학파들도 많으니까요. 그들이 갤러리스트로 활동을 한다 하더라도 자리도 많지 않을 뿐더러 큐레이터 본연의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시장도 적고요. 미술사, 예술학, 미술 실기 전공자, 미술 언저리에 있는 여러 학문 전공자, 디자인 전공, 문화 예술 경영 등에서 배출되는 사람들 중 큐레이터를 꿈꾸려는 사람이 10%정도라더군요. 지금 한국 시장에서는 절대 불가능이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전에 예산을 잘 편성할 필요도 있어요. 

전 대학 때 생물 전공에다가 생태, 환경에 관심도 많아요. 아무래도 점점 환경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만 가는데, 이게 구호적 측면에서 머무르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좀 아쉽다고나 할까요.
21세기는 환경과 문화죠. 이 두 가지를 접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매개자 역할이니까. 비록 정치권이 아니더라도, 문화와 예술로 풀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봐요. 전 그일을 하는 거고, 그 일에 때를 잘 만나기도 했고요. 사실 정치로 푸는 것보다 문화와 예술로 푸는 게 훨씬 어려워요. 문화는 스며드는 것이니까 그만큼 시간도 필요하고요. 감동이 없으면 사람이 절대 안 움직여요. 사랑도 감동이잖아요.

사진을 주제로 하신 이유는 전공이 사진이신가요, 혹시 사진은 잘 찍으시나요.
하하, 사진 잘 찍죠. 대학, 대학원을 그걸 전공했는데. 사진으로 돈을 번적도 있는데.

정말요, 찍은 사진을 제가 못봐서, 간혹 보면 컴퓨터 프로그래머인데 정작 컴퓨터 잘 못다루는 것처럼, 그런 건 아닌가 해서요.
(검지를 들어 올리며) 이게 중요해요. 이 검지. 이게 셔터를 누르는 손이잖아요. 전시 서문이나 평 쓸 때도 선한 검지, 부지런한 검지, 해학적인 검지, 이성적인 검지 이러거든요. 이 검지와 프레임 안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면 안 된다고 말하죠. 그만큼 숙련과 연습을 통해서 프레임과 검지가 하나가되어야 하죠.

오호, 확 사진 전공자의 느낌이 오는데요. 하하
저 같은 경우 지금은 돈이 없어서 카메라를 다 팔았죠. 지금은 자그마한 일명 똑딱이 디지털 카메라 하나 들고 다니면서 작가의 몫이 아닌 일상을 담아내는 정도로 사진을 찍고 있지요. 많이 찍어요.

참, 사진 잘 찍는다는 건 뭔가요? 전 사진을 찍다 보면 제 사진이 부끄러워서…
왜 그러죠? 음, 제 생각엔 사진 교육에 문제가 있어요. 커리큘럼을 반대해요.‘ 사진을 잘 찍는법’ 이렇게 타이틀을 붙이고 숫자를 매겨서 단계를 설정해 주는 것 자체가 마치 성공하기 위한 10계명이나, 행복해지기 위한 10가지 방법을 제시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봐요. 행복이 규정되거나, 성공에 틀이 있는 것이 아닌데. 정말 사진을 찍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어지죠. 마치 행복과 성공을 위한 계명을 갖고 있다가도 일상으로 돌아와서 고통과 슬픔이 찾아오거나 기쁨이 찾아오면 그런 계명을 싹 사라지고 그 고통, 슬픔, 기쁨을 그대로 느끼는 거잖아요. 행복이 이런걸까? 이렇게 고민하는 게 아니죠. 일상에서 습관과 연습, 노력을 잘 제어해서 육신과 이성, 그리고 감성의 지층을 재배열할 정도가 되야 하는 거죠. 계명을 놓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요. 그러니까 많이 안 찍으신 거네요!

사진의 좋은 점은 뭘까요?
감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에 감동하는지 나를 지켜보는 것이죠. 사진을 가지고 어떤 피사체를 담았다고 하다면 내가 어느 순간에 셔터를 누르고 싶은지와 일맥 상통한다고 생각해요. 기본과 시작은 한 작품 앞에서 무엇을 보는가예요. 무엇에 관심 있어 하는가를 관찰해 보는 거죠. 그리고는 즐기는 단계에서 고민의 단계로 가야 하는 거죠. 사진이 힘든 경우는 그 안에 인덱스지표적 성격이 있고, 심볼이 있고, 이이콘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만큼 어렵죠.
그래도 일대일로 세상을 만나며 우연적 요소를 담으면 참재미있죠. 사실 사진에서 우연적 요소가 가장 큰 힘이에요.
게다가 필름카메라가 주던 기억의 시간이 있죠. 36컷을 찍는 동안 나는 이미지를 잊어버려도, 필름은 기억하고 있는 거죠. 뭐랄까. 시간과 만나는 듯한 미묘한 짜릿함! 우연과 필연이 만나는 지점이죠(이 이야기를 하며 눈이 반짝이다가 금세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니 확실히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결혼은 했지만 자유롭게 서로를 배려한다는 최연하 큐레이터는 사실 전시 쪽에서는 꽤 성공한 독립큐레이터다. 사람 또한 굉장히 매력적인데다가, 지금도 더 희망찬 이슈들을 위해 사람을 만나고 작가를 만나고 길을 걷고 전시를 보고, 여는 그녀다. 그런 그녀를 만나니, 왠지 나도 그녀의 콜렉션에 한 명이 되는 듯했다. 사진기를 들어 나를 찍어주는 그녀의 검지 끝에서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어떤지 가늠해 볼 수 있었던 만남이었다. 자주 만납시다.
 


최연하가 추천하는 작품
주상연은 자연의 섭리와 교류의 비밀을 사진으로 옮기고 싶어 한다. 그녀의 사진에 등장하는 것들은 하늘, 신. 우주, 지구 등 세속적인 것을 초월하는 표상들이다(최연하).
ⓒ 주상연 distill 시리즈 중, c-print,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