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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12 03-04 싹, 틔움

싹, 틔움 3│가장 가벼운 것으로 존재의 무거움을 말하다 │ 설치미술가 조소희의 작업실


평소 작업실에 대한 로망이 가득하던 나였다. 도심을 벗어난 한적한 곳에 내 키에 딱 맞춘 넓은 책상과 문학 전집이 가득한 책장, 시원
한 통 유리벽이 있는 작업실을 마련하리라 꿈꿨다. 하지만 설치미술가 조소희의 작업실은 옷 가게, 다방, 음식점 등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건물들 사이에 있었다.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가는 9와 3/4 플랫폼이 떠올랐다. 아무도 그 평범한 정류장 벽이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인 줄 몰랐듯이 평범한 역 앞, 마을 한쪽에 이런 작업실이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작업실로 들어서는 나의 마음은 9와 3/4 플랫폼으로 뛰어드는 해리포터처럼 설렜다. 한 작품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이 이뤄지는 곳은 어떤 곳일까, 작가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자리하고 있을까. 글 최새롬 · 사진 신화민


작업실, 그리고 서재
작업실로 들어서자마자 3월 초 전시를 앞두고 한창 작업 중인 구조물이 보였다. 빨간색 실로 촘촘히 짜인 그것은 차지하고 있는 부피뿐만 아니라 높이도 바닥부터 시작해 천장에 걸어 놓아야 할 정도로 엄청났다. 가볍디가벼운 실이 나를 압도했다. “제가 쓰는 재료들은 휴지, 실, 굉장히 가벼운 이런 것들,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바로 일보 직전에 있는 것들이에요. 하지만 노동력 때문에 굉장히 무거운 거죠. 저한테는 선물 같은 걸 받아도 선물 자체보다 선물을 싸고 있는 꼬깃꼬깃한 종이, 구겨진 주름 같은 게 아주 아름다워요.” 역발상, 관점의 전환 같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역시, 예술가는 4차원인가 보다. 작업하다가 실이 엉키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대꾸가 시원스럽다. “그냥 끊어내요(웃음).”
작업실 여기저기에는 작업 중인 작품들이 놓여 있어 분주함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별다른 장식 없이 흰 벽으로 둘러싸여 조금은 심심했다. 시각적인 것에 민감해서란다. 집도 다소 휑하다고 했다. 미술가답다. 작업 공간과 달리 작업실 안쪽의 서재에는 사진, 인형 같은 아기자기한 물건과 책이 진열되어 있었다. 쉬는 기간에는 그곳에서 책을 많이 읽는다고 했다.“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작업이 많은 것도 연관이 있죠. 동시에 작은 오브제 작업들 수장고이기도 해요.” 유학 시절 벼룩시장에서 사 모은 소품과 개인적인 추억이 담긴 오브제, 편지 등의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요즘처럼 전시를 앞두고 있을 때는 작업실 쪽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요. 서재를 그리워하면서.”


작업과 일상의 공명을 만들어가다
다시 작업 공간으로 돌아가 구석구석을 살폈다. 색색의 실이 감긴 패들과 제도용 자, 재봉틀, 타이프 등이 놓여 있었다. 조소희의 작품은 실을 짜고 휴지에 글자를 타이핑 하는 등, 온통 수작업을 해야 한다. 오랜 시간을 들여 꾸준하고 반복적으로 작업해야 하는 작품의 특성 때문에 인내심이 많고 차분하지 않을까 했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다. “실제로는 아주 감정적이고, 오늘은 날이 놀아야 하는 날이다, 그러면 뛰쳐나가야 하는 스타일이죠. 그런데 그런 걸 안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 성격과 다른 작업 과정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묻자 용수철처럼 대답이 튀어나온다. “뛰쳐나가기도 하죠! 사람들이 불러내면 ‘고맙다!’ 하면서 나가고(웃음).” 
그녀의 목표는 공무원형 작가란다. 그래서 이르면 7시 반에 칼출근해서 6시가 되면 작업량에 상관없이 칼퇴근한다. 온종일 틀어놓는 라디오가 알람시계 역할을 해준다. 제일 좋아하는 프로는 <신지혜의 영화음악>이다. “딱 한 시간. 그때가 제일 기분이 좋아요. 작업도 제일 잘될 때고 정신도 맑고 음악도 좋고요.” 전시가 없을 때도 늘 규칙적으로 작업한다고 했다. 조금은 여유로움을 즐겨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녀는 철저했다. “그게 내 작업의 콘셉트이기도 하지만, 콘셉트처럼 사는 것이기도 해요. 내가 시간을 통해 존재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얘기했을 때는 내 개인적인 시간 안에서도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작년 말 마르바 던의 <안식>이라는 책을 읽고 난 뒤로 주일에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한 번 쉼표를 찍는 리듬을 만들어주신 것, 그 시스템이 참 좋아요. 하나님이 아니면 이 시간에 일해야지 쉴 수 있겠어요?” 안식 에 대한 깊은 묵상은 작업으로 이어졌다. “텍스트는 다 사라지고 문장 부호, 호흡만 남는 거예요. 안식이 그거잖아요. 완전히 비어 있는 공간. 그런데 그 비어있음이 아무 의미 없음이 아니라 거기에 더 많은 말이 들어있는 거죠. 문장부호 안
에, 단어와 단어 사이에, 행간과 행간 사이에.” 하나의 작품은 그렇게 시작되는구나. 그런데 구상을 옷, 신발 등 특정 사물로 구체화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걸까. “그냥 어떤 걸 보면 아, 이 작업은 옷을 만들어야 이 개념이, 생각이 가장 잘 표현되겠다. 그렇게 생각나는 거예요. 개인적인 취향도 분명히 반영되죠.” 보이는 것을 짜고 엮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감지하게 하는 작업. 논리보다는 직관이 더 큰 역할을 하는가 보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며 애초 품었던 작업실에 대한 로망은 진중한 삶의 태도와 화두에 대한 그것으로 바뀌었다. 좋은 작품은 멋들어진 작업실이 아니라 작가의 치열한 고뇌와 프로정신에서 탄생한다. 화두를 품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간이 씨앗이라면, 작품이 탄생하는 것은 씨앗이 여물어 싹을 틔우는 것이 아닐까. 실을 짜고 타이핑을 하는 조소희 작가의 작품은 현재진행형으로 고민이 여물어가는 시간이자 고민의 무게 그 자체다.




휴지, 실, 종이 등 가볍고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현재형으로 시간을 쫓아가고 존재의 무게를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
다. 그녀의 작품은 끝없이 풍선을 날리는 것과 같은 인생의 허무를 직시하게 함과 동시에, 반복에서 발생하는 틈과 결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한다. “나는 구멍을 짠다. 레이스의 아름다움은 그 구멍들에 있지 않은가? 도넛 구멍의 익살은 재미있지 않은가?” - 조소희 작가 노트 <사絲적 인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