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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고전으로 오늘을 읽다

역사를 살아간다는 것│E.H.카 <역사란 무엇인가>








정체성은 어디서 시작될까요? 다양한 답이 있겠지만 제 생각에 가장 주요한 것은 기억입니다. 얼마 전 알츠하이머에 걸린 여성이 나오는 드라마가 방영됐었습니다. 드라마는 큰 인기를 끌었고 그 인기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여인의 고통에 깊게 공감했습니다. 심지어 알츠하이머라는 병이 사회적 이슈가 될 정도였으니까요. 사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자신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역사를 안다는 건 그래서 참 중요합니다. 역사는 공동체의 기억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더듬어 보는 것도, 집단적으로 공동체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도 모두 소중한 일입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나 역사를 되돌아보지 않는 공동체나 자신을 잃어버리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이 자아를 잃어버렸다는 일, 자기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이 일이 백 가지 병, 백 가지 폐해의 근본원인이 된다”는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은 역사의식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질책이기도 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역사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말해주듯 역사의식이 없는 공동체는 쉽게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살펴볼 책은 영국 역사학자 카(E. H. Carr, 1892~1982)의 <역사란 무엇인가>입니다.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첫 페이지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책입니다. 워낙 유명해서 그 내용을 다들 잘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도 않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읽지 않은 책’이라는 고전에 대한 고전적 정의에 잘 들어맞는 책이라고 할까요? <역사란 무엇인가>는 모두 6장인데, 널리 알려진 내용은 대부분 1장에 들어 있습니다.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에 대한 유명한 정의도 1장에 나옵니다. 하지만 이 책의 백미는 저 뒤 5장입니다. 5장에서 저자는 역사에 대한 1장의 정의를 수정합니다. 즉, 1장 내용은 저자의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었던 셈이지요. 그러니 뒷부분까지 읽어야 역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역사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 볼까요? 카는 우선 당대의 주도적인 역사관을 비판합니다. 당시에는 역사를 사실에 대한 객관적 서술로 보는 관점과 반대로 역사가에 의한 주관적인 해석으로 보는 관점, 이렇게 두 관점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한 쪽은 역사 서술의 객관성을, 다른 한 쪽은 주관성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카는 두 입장 모두 반대합니다. 그는 역사 서술이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고 봤습니다.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역사 서술이 완전히 주관적어도 안 됩니다. 아무리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역사 서술과 소설은 구분되어야 하니까요. 가령, 많은 각색과 첨가가 있었다고 해도 <뿌리 깊은 나무>는 <해를 품은 달>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작품입니다. 하나는 한글창제라는 객관적인 역사를 담고 있고 다른 하나는 완전한 창작품으로 그저 상상력의 소산일 뿐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완전히 객관적일 수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주관적일 수도 없다고 카는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이 두 입장을 절충해 역사에 대한 저 유명한 정의를 내놓습니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므로, 이 상호작용은 또한 현재와 과거의 상호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을 소유하지 못한 역사는 뿌리도 없고 열매도 맺지 못한다.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생명도 없고 의미도 없다. 여기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최초의 대답을 하기로 한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그런데 이는 잠정적인 결론일 뿐입니다. 역사가와 과거 실과 하는 대화라는 게 중립적인 듯 하면서도 그렇지 않습니다. 대화의 칼자루는 역사가가 쥐고 있을 테니까요. 역사가에게는 과거 사실을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래서 카는 해석의 기준을 다시 제시합니다. 일단 역사가와 과거 사건과 대화라는 해석의 장은 만들어 놨으니, 이제 대화할 때 역사가가 주관성에 빠지지 않게 할 기준을 마련하면 됩니다. 카가 제시하는 기준이란 바로 미래의 가치입니다.

미래만이 과거를 해석하는 열쇠를 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에 있어서의 궁극적인 객관성을 이러한 의미에서만 말할 수 있다.

카가 생각하기에 객관적인 역사 서술은 올바른 미래적 전망을 확보하고 그것을 기준삼아 과거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좋은 역사가란 앞으로 만들어야 할 좋은 세상의 청사진을 그려내어 그에 비추어 과거를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가령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상이 자유로운 세상이라면, 우린 자유라는 가치에 비추어 과거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원한다면, 평화가 과거 해석의 기준이 되겠지요. 역사란 과거에서 과거만 보는 게 아니고, 과거와 함께 현재와 미래를 함께 읽어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역사읽기란 과거를 향한 회고라기보다 미래를 향한 도약입니다. 카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란 과거 사건들과 미래의 목적 간의 대화이다.’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는 미래에 대한 이해를 향해서 나아감으로써 비로소 객관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번 강연 때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말했지만, 오히려 역사란 과거의 여러 사건과 차차 나타나는 미래의 여러 목적간의 대화라고 불렀어야 옳았을 것이다.

역사를 살아간다는 건 앞으로 와야 할 좋은 세상에 대한 기대를 품고 과거에서 그 희망의 씨앗을 찾아 오늘이라는 땅에 그 희망을 길러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역사를 살아낼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진 것은 아닐까요? 분명한 미래적 전망이 있으니까요. 독일의 신학자 아니 몰트만(Jürgen Moitmann, 1926~)의 말처럼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로마서 15장13절)’이고, 우리가 믿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우린 반드시 역사를 살아내야 합니다. 희망해야 할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성서에서 발견하고 우리가 걸어 온, 그리고 걸어가고 있는 길을 되짚어보며 새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특권인지 모릅니다. 이사야가 처절한 현실에서 이렇게 미래를 희망하고 그렇게 현실과 싸웠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이사야 11장 6-8절).


김영수| 대학에서 철학을,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50대에도 고전을 읽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은 50대와 함께 고전을 읽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학교가 아니라 삶을 위해 공부한다.”는 말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