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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한페이지 단편 소설

에어포트 라운지

“아, 그게 말이야. 요즘 집 앞에서 원룸 공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소음이 심해서…. 도통 집중이 안 돼.” 
공모전 준비는 잘 하고 있냐는 미나의 말에 생기지도 않은 원룸 이야기를 꺼냈다. 동네 산책을 하다가 새로 짓는 원룸을 본적은 있어도 집 앞에서 공사를 한다는 건 거짓말이다. 미나는 대뜸 낯선 곳에서 글을 써보란다. 날씨도 좋은데 집에만 있으면 글이 잘 써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나. 내가 쓴 소설을 읽어봐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고칠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더해져서 여기저기 짜깁기를 한 흔적이 보인다. 결국에는 왜 이런 걸 써야 하는지 의문마저 생겨 버려 한참 동안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론 곤란하다. 마감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다. 귀가 솔깃해져서 노트북을 가방에 담고 길을 나섰다. 동네 슈퍼에 담배를 사러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집 밖으로 도통 나오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패딩점퍼를 입지 않아도 되는 날씨가 되다니. 벚꽃은 이미 져 버렸고, 나무에 새파란 잎들이 이미 솟아올라와 있다. 
어디가 좋을까? 카페에서 글을 쓰는 건 질색이다. 옆 테이블에서 여자들이 떠드는 것도 싫을 뿐더러 반복되는 음악은 최악이다. 커피 가격은 또 왜 그리 비쌀까? 그렇다고 공원에서 쓰기에는 춥고 햇볕도 강하다. 도서관에 갈 바에는 차라리 집에서 쓰겠다. 
하염없이 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생각했다. 이럴 때 작업실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백수 취급하는 부모님의 눈치를 받지 않아도 되고,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담배도 피울 수 있을 텐데. 원하는 음악도 시끄럽게 틀어놓고, 미나도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잖아. 1억짜리 상금을 타면 이 모든 것이 한 방에 해결 될 것이다. 졸업하고 3년 동안 창작에 매진하면서 받은 온갖 서러움은 모두 씻길 것이다. 당선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마지막 남은 담배를 다 피우고 하늘을 쳐다 보았다. 비행기 한 대가 길고 흰 꼬리를 그리며 사라졌다. 문득, 가보고 싶은 장소가 떠올랐다. 
한 번도 타보지 않은 공항철도를 타고 인천 국제 공항에 다다랐다.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공항과 철도는 우주선처럼 생긴 건물에 연결되어 있고 윗 층에는 실내 정원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거대한 공간이 슈트케이스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떠나 전 세계로 여행을 간단 말이지…. 
유리와 철골 구조로 된 유선형의 공항을 어슬렁거렸다. 마치 두 시간 뒤에 먼 곳을 떠나는 사람처럼 항공사 카운터를 기웃거리고 서점에 들러 베스트셀러도 구경했다. 그곳에 조만간 내 책이 전시되겠지. 거대한 공항을 몇 번 왕복했더니 다리도 아프고, 노트북을 맨 어깨도 저려왔다. 나도 사람들을 따라 출국장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여권도 없고 비행기표도 없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공항 전망대에 앉아 코끼리처럼 쉬고 있는 비행기를 구경하는 것 뿐이다. 그들은 느릿 느릿 활주로를 움직이다가 깜짝할 순간 이륙해 버렸다. 이 광경을 해가 질 때까지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띠링’ 하고 문자가 왔다. 미나다. 
<어디야?>
<공항>
한참동안 대답이 없다. 나는 노트북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고물이 다 된 탓에 부팅 시간이 꽤나 오래 걸렸다. 윈도 바탕화면이 보이자 미나가 답장을 보냈다. 
<어디 가?>
<아니, 글을 쓰러 왔어>
<잘 써져?>
<이제 컴퓨터를 켰는 걸>
워드 프로세서를 실행시켜 최종 수정한 원고를 불러 들였다. 분명 원고 끝에는 ‘끝’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끝이 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있잖아…. 힘들면 쉬었다 해도 돼>
<너무 쉬었는걸>
<비행기 타고 도망만 치지마 ㅋㅋ>
‘ㅋㅋ’ 라고 적힌 문자를 보니 정말 미나가 옆에서 크크, 웃는 것만 같다. 이제야 글을 쓸 수 있는 장소를 찾은 것 같다.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났다가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돌아오는 장소에서 어쩌면 나도 나만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최소한 한 사람은 있다. 도망만 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서진|소설가, 한페이지 단편소설(일명, 한단설 1pagestory.com) 운영자.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로 12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 에세이와 소설을 결합한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 출간. 세상의 가장 큰 의문을 풀 책을 찾아 헤매는 북원더러(Book Wanderer) 3nightson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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