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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한페이지 단편 소설

태풍이 온다

태풍이 오면 그녀는 해운대로 가자고 했다. 한 여름이 지나 가을이 다가올 무렵 허를 찌르고 태풍은 오게 마련이다. 태풍은 언제나 일본과 한국 사이를 관통하고 부산은 그 중간 지점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태풍을 맞는 곳이었다. 집이 무너지고 홍수가 나고 하는 것에는 상관없다는 듯이 그녀는 태풍이오면 이렇게 말했다. 
“자, 해운대로 가자.” 

파도에 휩쓸리거나 비바람에 날아가는 위험을 감수하기는 싫었지만 그녀는 당시에 내 여자친구였으므로 함께 갈 수밖에 없었다. 흔들거리는 버스를 타고 해운대에서 내리면 우산도 제대로 펼 수 없을 정도로 비바람에 흠뻑 젖어 버렸다. 그녀는 동백섬 쪽에 있는 호텔로 들어갔다. 그리고 로비의 커피숍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창 밖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태풍을 구경하는 것이다. 

바다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본적이 있는지? 그것도 강풍과 함께 떨어지는 빗방울은 수평선이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뿌옇게 만들고, 시커먼 파도는 넘실대며 해안과 방파제를 강타한다. 그런 광경을 해안이 죄다 보이는 거대한 윈도우 안에서 조용한 실내악을 들으며 굉장히 비싼 커피를 마시며 보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고 바로 위에 있는 호텔로 직행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나는 보타이를 한 웨이터가 시시때때로 다가와 빈 물컵에 물을 따라주는 그곳이 불편했지만 그녀는 소파에 몸을 파묻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태풍이 오는 창밖을 구경했다. 

“멋있지 않아? 꼭 이 광경을 너와 함께 보고 싶었어. 세상이 멸망하는 것 같이 부서지고 있어도, 이 안에서 안전하게 바깥을 구경할 수 있거든. 신기하지 않아?” 
그리고 그녀는 나의 손을 꼬옥 쥐었다. 그해 세 번, 나는 그곳에서 커피를 마셨다. 태풍이 세 번 강타했다는 이야기다. 그 다음해, 그녀와 헤어졌으므로(무슨 이유로 헤어졌는지는 너무 복잡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태풍이 와도 해운대로 갈 일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나니 태풍이 와도 사무실 안에서 비바람 소리를 간간히 들을 뿐이었다. 월급의 힘이란 무서운 것이다. 

태풍이 불 때 해운대로 다시 가게 된 것은 올해 가을이었다. 해외에서 업무차 방문한 바이어가 그 호텔에 묵었었기 때문에 그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로비에 들어서면서부터 윈도우를 통해 보이는 거대한 파도와 비바람에 움츠려들 정도였다.

나는 그녀를 떠올리며 커피를 마셨다. 약속 시간까지는 한 시간이나 더 남았다. 넋을 잃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나는, 서너 테이블 건너편에 혼자 커피를 마시는 여자를 보았다. 단아하게 한쪽으로 묶은 머리, 수수한 옷차림, 긴 손가락, 무테 안경, 갸름한 턱, 그녀와 흡사하게 닮았다. 그녀는 하얀 테이블에 하얀 커피 잔을 놓아두고 한 모금 한 모금 커피를 아껴가며 마시고 있었다. 물론 창 밖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심호흡을 몇 번 한 뒤에 고개를 돌려 다시 보았을 때엔 그녀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

얼마 뒤에 그녀 소식을 대학 동창들에게서 들었다. 3년 전 태풍이 오던 날 그녀가 해운대에서 실종되었다고. 누구도 왜 그녀가 태풍이 불던 날 해운대로 갔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경찰은 파도에 떠밀려 갔을 거라고 했다. 어떤 이는 그녀가 분명 복잡한 심경에 자살을 했을 거라고도 했다. 태풍에 날아가지도 않는 복잡한 심경이었을까? 이번 주말 18호 태풍 송다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단단히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갈 것이다.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는 그녀와 조우를 기대하면서.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아주 천천히, 마음 속 깊은 곳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운이 좋다면 호텔 방으로 함께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서진|소설가, 한페이지 단편소설(일명, 한단설 1pagestory.com) 운영자.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로 12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 에세이와 소설을 결합한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 출간. 세상의 가장 큰 의문을 풀 책을 찾아 헤매는 북원더러(Book Wanderer), 3nightson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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