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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어른이 된다는 것

폐쇄적인 교회문화. 어뜩하지, 너?

어릴 적 찬양을 인도하던 교회 오빠는 나이가 저보다 한참이나 많아서 갓 중학생인 된 제게 사회생활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죠. “살면서 어려울 때가 많겠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다 보면 어느새 주위를 정리해주셔서 ‘좋은 사람’을 붙여주신다.” 사람과 맺는 관계가 점점 어려워지는 사춘기 초입에 들었기 때문일까요, 이 말에 상당한 위로를 받아서 저 또한 이 말을 자주 해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 말을 꺼내기가 어렵습니다. 좋은 사람이라니, 그 좋은 사람의 기준은 또 뭐랍니까? 네,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지요. 기독교인입니다. 교회 문화를 이해하는 그런 사람이죠. 

교회에 오셨으니 교인처럼 행동하세요!
드디어 청년부에 새로운 사람이 왔습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전도를 받아 교회에 첫발을 디딘 분이었습니다. 그전에도 교회에는 종종 새로운 얼굴이 왔었지만, 대개 누구의 자녀이거나 애인, 가족, 친구 등이라 교회와 교회문화를 전혀 모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죠. 그런데 이번엔 달랐어요. 스스로 ‘교회입문’이라고 말할 만큼, 진정한 입문자였던 겁니다. 예배를 마치고는 바로 가시곤 하셔서 인사도 못할 때가 많았죠. 청년부에서 그나마 나이 차가 적은 게 저인지라 제가 나서야 했는데도 쉽게 못 했어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드디어 며칠 간 꼼짝없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수련회가 다가왔고, 그제야 새로 온 청년이 이른바 문화충격을 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수련회 저녁 집회에서 처음으로 통성기도를 본 겁니다. 
처음이라 그럴 거야. 어려서부터 교회문화에 익숙한 저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누구나 처음 겪는 상황이란 건 있게 마련이고 서서히 물들 테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딘가 좀 꺼림칙합니다. 뭔가가 빠져있었어요. 바로 교회문화를 익혀야 할 당사자, 새로 온 청년입니다. 저는 그만, 순한 방법일 뿐이지 당하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주님을 나‘만’의 피난처로
교회에 있으면 너도나도 교인이라 못 느끼는 게 있는데, 바로 이 나라 인구의 개신교 비중이 2할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에서 한 발만 나와도 세상은 비기독교인 위주로 돌아갑니다. 소위 세상문화라고 말하는 각종 문화를 떠올리면 교인을 배려하는 게 거의 없죠. 처음에야 거절을 못 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지만, 조금씩 노련미를 갖춰 요리조리 피해 다닐 수 있게 됩니다. 끌려다니거나 피해 다니거나 지치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때마다 우리는 주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으며 교회로 달려옵니다. 교회에는 교회여서 주는 아늑함이 있습니다. 내가 겪는 고통을 이해해 주고 함께 기도해 줄 사람도 있죠, 고통을 이겨냈다고 위로해 주는 사람도 있고요. 특히, 그게 뭐가 됐든 내 모든 걸 알아주실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그래서 조금씩 교회에서만큼은 소수자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겁니다. 교인들만 모여야 해요. 교회문화를 모르는 사람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이렇지 않은 분이 더 많겠고, 또 많아야겠지만, 저는 그랬습니다. 교회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저를 설명할 수 없다 보니 소개팅이 들어와도 맨 처음 질문은 “교회 다녀?”였어요. 아니라고 하면 왜 그런 사람을 소개하려고 하느냐고 되물을 정도였죠. 어느 모임에 가더라도 어떻게든 교인을 찾아내어 반가워했습니다. 이렇게 비기독교인을 걸러내며 저는 제 주위를 ‘좋은 사람’으로 채웠고, 전 그렇게 고립을 선택한 겁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도지를 돌리면서도 막상 전도지를 받고 찾아올 사람을 어떻게 맞아야 할 지에 대해선 전혀 준비하지 못한 게 되어 버렸습니다. 비기독교인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언어를 쓰는지, 교회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도 못한 채로, 어렵게 찾아온 사람이 교회 문화에 적응을 못 하고 튕겨 나가는 걸 보면서도 뭐가 문제인지 몰랐던 거예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쌓은 담이 성벽이 되어 버린 교회 문화, 이거 어떻게 해야 하죠? 글 원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