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김준영의 페북 친구

유쾌하게 수다 떠는 문화 향유자 에디공 대표, 박준용


우연히 클릭한 강연 동영상 제목이 “영화가 죽어도 못 따라오는 연극의 중독적 매력 세가지”다. 흠칫 놀라 뭐 이런 신기한 제목이 있나 하고 15분 동안 하는 그 강연을 보고 나니 알 수 없는 웃음이 나오질 않는가. 쉴새 없이 움직이는 손 동작, 벌릴 수 있을 만큼 벌리며 말하는 입에, 과도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 표정까지. 게다가 15분간 원고도 들지 않고 한 숨에 달리는 듯한 스피치 능력까지.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누르니 누군가 그 강연의 동영상의 한 컷을 캡처한 후 “지못미!” 라며 포스팅을 했다. 그는 영화, 연극, TV, 미술, 인문학, 책 등 문화 예술 다방면의 관심을 두고 수다 떨듯 이야기하며 인간 삶의 그 아랫자리를 가감없이 말하는 유쾌한 문화 해석 향유자다. 가을 늦은 밤 그를 만났다. 글 · 사진 김준영

문화를 소재로 다양한 장을 통해 소통하며 문예 코디네이터, 문화 프로그래머라는 호칭으로 불리는데 내가 붙인 것은 아니고 ‘청어람아카데미’에서 함께 일하며 붙은 호칭일 거다. 기독교 청년을 대상으로 정치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키워주려는 의도로 그 아카데미를 시작했었는데, 이에 더하여 문화 예술 부분에도 필요성을 공감하고 다른 트랙을 프로그래밍하고 강의했다. 사실 내게 익숙한 것은 크리스천 문화 사역자다. 이 호칭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기독교 울타리에서 유통되는 가장 보편적으로 부르는 호칭이기에 부담없이 받아들인다. 

연극과 영화 관련 강의를 주로 하고 ‘에디공’ 이라는 단체의 대표로 다양한 주제로 많은 이들과 소통하고 있는데, 전공이 궁금하다 총신대학교 89학번이다. 신학 전공자다. 대학교에서 연극 동아리 활동을 했었다. 그 때는 무척 보수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연극 동아리에 가입하고 활동한 기간이 내게는 많은 고민을 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 동아리 활동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관점도,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연극이란 도구를 통해 삶과 사람에 대한 관점이 전향적으로 바뀌고 성장하는 경험을 내가 했으니까, 다른 이들에게도 비슷한 도움을 주고 싶었다. 분명히 도움을 주는 사람이 필요하겠다 생각하고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했었다. 

그래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간 것인가. 신대원을 선택하지 않고 학부에서 연극을 다시 전공한 것이 지금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겠다 그렇다. 문화를 매개로 해서 신앙과 삶을 낯설게 되돌아보고 더 넓고 깊게 확장할 수 있는 일에 매진하고 싶었다. 당시 문화 사역자들, 굳이 나눠 보자면, 나는 1세대 문화사역자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전문성이 부족했다. 문화 예술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선정적 방식으로 논리적 근거 없이 기독교 문화 운동을 펼쳤다. 그 후 2세대라 할 수 있는 문화 사역자, 즉 지금도 한국 기독교 내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분들은 철학적 신학적 윤리적 토대는 단단하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문화 예술 분야에 있어서는 일반인 정도 수준이다. 그러니 실제 문화 예술 부분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다루는 콘텐츠와 재료로 그들과 소통하기에는 적잖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1, 2세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일종의 은혜다. 그리고 일명 3세대 문화 사역자라 부를 수 있다. 나로서는 두 가지 축을 모두 갖춰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러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기독교 신학과 철학에 대한 명료한 토대와 문화 예술 영역의 전문적 식견을 지녀야 좀 더 효과적이고 소통 가능한 기독교 문화 사역자로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겠다 싶었던 거다. 그래서 연극영화과에 학사 편입한 거다.(웃음) 

그렇담 현장 경험도 한 것인가 그렇다. 학사 편입한 것이기 때문에 짧은 기간에 많은 것을 해내야 했다. 집단 작업 판에 들어가기 위해 참 많은 노력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한양대학교는 연극과 영화가 통합 과정에 속했기 때문에 연극뿐 아니라 영화, 미학, 예술, 공연예술학 등을 배울 수 있었다. 게다가 졸업 후 1년 정도 대학로 연극판과 영화 현장 경험도 했으니 어떤 문화적 산물이 나오는 과정까지 두루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기독교 필드만 강의하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물론이다. 일반 필드에서도 강의를 하는데, 주로 문화 예술 콘텐츠를 소재로 일반적 관점을 이야기한다. 기독교를 기초로 하는 사역자의 이름이지만 문화 예술 필드 경험이 있다 보니 가능한 포지션이다. 

모 강의 동영상을 봤는데 에너지가 넘치고 수다스러운 느낌까지 받는다(웃음) 원래 그랬나?(생각) 아마 대학교 때 신학교 선배 중에서 연극 전공한 분에게 영향을 받아서 그런 듯하다. 신학과에는 별의별 스토리를 지닌 사람이 오니까. 내 지론은 ‘수다가 나를 살리리라, 잡담이 구원하리라’다.(웃음) 

수다, 잡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무조건 수다 떨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수다, 잡담은 반드시 듣는 것, 보는 것, 생각하는 것을 전제한다. 우리는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말부터 하려고 해서 문제다. 성경에서도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했다. 내가 기독 청년들에게 해주는 말 중에 가장 중요시 여기는 점이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기독 청년은 어떤 이미지라고 생각하는가 갑자기 숙연해지는데(웃음) 정답은 없을 것이다. 다만 두 가지 정도 이야기 해주고 싶다. 먼저,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했으면 좋겠다. 보지도, 듣지도 않고 말하기만 하려고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들은 누군가 내려준 답을 알고 있다. 어떤 민감한 사안에 답을 스스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안에는 정황과 맥락이 아주 다양하게 얽혀 있는데, 이것은 무시하고 답만 내리려 한다. 그들의 정황과 맥락을 듣지 않는다. 말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말하기 위해서 듣는 것, 보는 것,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수다가 나를 구원하리라는 말과 상충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가.(웃음) 그렇지 않다. 수다를 떨고, 잡담을 늘어 놓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래 참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그래야 보인다. 아이를 양육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의도를 알기 위해 오래 참아야 한다. 기다리고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과정이 생략되면 일종의 비닐하우스 신앙인으로 자라기 쉽다. 나쁜 짓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듣고 보고 느낄 수 있고, 사고를 해야 한다. 삶의 여정을 생각해 봐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본 것이 바로 그 사람의 뒤와 여정이었다. 수가성 여인에게도 그러했고, 간음하다 현장에 잡혀 온 여인에게도 그랬다. 

그 시대 가장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드러난 모습, 그들의 소재만 두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청년에게 아무리 불편한 영화라도 중간에 나오지 말라고 한다. 심지어 보지도 않고 카더라 통신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너무 많다. 보지도 않고 말하는 무지함은 우리가 흔하게 취하는 신앙의 오류다. 

두번째는 무엇인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었으면 좋겠다. 울고 있으면 말하려고 하지 말고,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울었으면 좋겠다. 웃는 자들과는 함께 웃어 주었으면 좋겠다. 울지 말고.(웃음) 

문화를 정의하려 들지 않겠다. 그러나 문화 속에서 어느 한 쪽으로 경도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길은 없겠는가 흔히 우리는 소재와 요소의 불경성만 지적한다. 영화로 예를 들어보자. 영화에서 폭력적인 장면이 난무할 수 있다. 그 요소가 난무하는 그것, 혹은 그것을 소재로 다루었다는 그 자체로 나쁜 영화다, 봐서는 안 되는 영화라고 답을 내려 버린다. 언제까지 보지 말고, 가지 말고, 듣지 말고, 하지 말라는 소위 4불정책의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가. 참, 안타깝다.
성경을 조금만 더 들어다 보면 그런 소재와 요소가 성경에도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그런 요소가 있다고 성경을 없애버리거나 부분 삭제하지 않는다. 그런 요소가 난무하는 곳이 현실이고 삶이지 않는가. 폭력을 소재로 폭력이 난무한 막장 영화가 왜 없겠나. 있다. 그러나 폭력을 소재로 하여 선혈이 낭자한 영화이지만 폭력적인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폭력의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게 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영화도 있다. 언제까지 월트디즈니 영화만 볼 건가. 아니면 음성적으로 몰래 숨어서 볼 것인가. 현실을 껴앉을 수 있는 인력과 포용력을 지녀야 한다. 이 시대 문화의 뒤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요소와 소재를 어떤 방향과 내용에서 사용하는지 볼 수 있어야 한다. 

해석과 향유가 중요한 지점이 바로 그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우리는 무작정 문화 소비자로 산다. 바보같은 행동이다. 향유해야 한다. 누리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운영하시는 에디공의 내용을 보면 아주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문화 예술 미디어 텍스트를 읽고, 영화를 보고, 노는 모임으로 시작했다. 3-4년 전까지만 해도 활발히 활동했다. 최근 2-3년 동안 조금 뜸해졌다. 다른 일로 바빠지기도 했고, 밥 문제도 해결을 해야 하니까. 문화 사역자의 고된 하루가 있지 않겠는가.(웃음) 하지만 에디공을 통해 ‘주말의 명화’는 계속 하고 있다. 8주 동안 주말에 한 편씩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고, 해석하는 모임이다. 해석 워크샵이라 하겠다. 

기독교에서 흔히 통용 되는 논리 중 문화 창조 명령이 있는데, 사실 좀 불편할 때가 있다 동감한다. 난 문화 창조에 관심이 없다. 물론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생각해 보라.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많은가 보는 사람이 많은가. 음악도, 연극도, 미술도 모두 다 말이다. 문화 사역자를 꿈꾸는 청년을 보면 모두 무엇인가 만들어 낼려고 한다.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층이 보고 듣고 즐기는 사람들 아닌가. 단순 소비자에서 넘어서서 향유할 수 있는 해석력과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다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 그러나 한 사람의 전문인에게 의존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나는 공동체라는 단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해석 공동체 말이다. 전문인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일종의 서포팅의 역할이다. 조력자들이다. 대신 해석 공동체의 역할을 더욱 키워야 한다. 우리는 공동체를 떠나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필연적이다. 특히 크리스천에게 공동체는 예수의 몸이니까. 

개인이 아닌 집단적 지성을 말하는 것인가. 무조건 집단적 지성의 해석을 수용하지는 말아야 한다. 요즘은 집단적 지성을 너무 신뢰하지만, 사실 영화만 보더라도 감독의 의도와 집단지성이라 할 수 있는 독자의 해석 그리고 네러티브이야기의 중요성도 고려하고 읽어내야 한다. 우리는 세 개를 다 고려해야 하지만 이야기에 담긴 상징을 해석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영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영화를 잘 읽을 거라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그들이 구조적 분석에 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영화가 이야기하는 삶의 그 자리를 이해하는 것은 영화 매커니즘을 이해하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다. 삶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기초예술과 대중문화예술 전반이라 하겠다. 형식주의 예술은 10%도 채 못 미친다. 우리의 문화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온통 이야기다. 거기에 캐릭터가 있고, 삶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은 전공과 무관하다. 오히려 선입견을 배재하고 그 이야기 자체를 자신의 삶과 밀도 있게 접합하여 공동체에서 말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향유를 경험할 수 있다. 

쉬운 방법을 알려 주라(웃음) 계속 영화를 예로 드는데, 영화의 캐릭터, 플롯, 스토리는 대부분 은유(메타포)다. 현실의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저 캐릭터, 인물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인물을 통해 감독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일까 부터 시작하면 된다. 보고, 듣고 수다를 떨라! 그리고 일반인의 시각도 믿으라.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 보통 그들이 좋다는 영화는 좋다! 그걸 선택해서 읽어서 이야기하면 좋겠다. 

1시간 반 남짓한 시간, 무엇인가에 빠져 들었던 인터뷰였다. 후배 문화 사역자가 나오지 않는다며 말을 흐리는 그의 말에서 이 시대를 향한 그의 마음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늦은 밤까지 그와 나누며 들었던 말과 말투, 표정, 내용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PEOPLE > 김준영의 페북 친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상민 쉐프  (0) 2012.08.14
최연하 사진전시 독립큐레이터  (2) 2012.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