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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식이 형식이다?

요즘 TV의 모 ‘리얼 버라이어티쇼’ 프로그램의 오프닝은 언제나 ‘무형식이 형식이다’로 시작한다. 무형식이 형식인 프로그램은 좋게 보자면 짜진 각본에 얽매임 없이 자유분방하게 진행된다는 점이고, 나쁘게 보자면 들쭉날쭉 산만한 방식으로 흘러버리기 십상이다. 형식으로부터의 자유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사뭇 기대와 염려를 나눠 품어 보게 된 나는 우리가 드려 온, 혹은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에서의 형식의 중요성을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전통적 예배와 현대적 예배

많은 이들은 대부분의 교회가 드려온 전통적 예배(Traditional Worship)는 현대적 예배(Modern Worship)에 비해 본질보다 형식에 집중하는 것처럼 오해한다. 그러나 근래 대안적 예배로 주목받는 Emerging Worship은 오히려 전통적 예배의 형식에서 새로운 세대의 예배의 본질을 찾고자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전통적 예배의 형식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길게는 모세의 장막에서의 제사, 짧게는 초대교회의 공동체 예배에서 그 근원적 형태를 찾을 수 있을뿐더러, 교회의 오랜 전통과 의식을 이어온 것으로 아름답고도 좋은 형식이다. 예전이 지나치게 강조된 가톨릭의 미사와 비교해 볼 때, 다소 간소하면서도 본질적 의미들을 놓치지 않고 잘 담고 있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지속되고 반복되다 보니 타성에 젖기 쉬운 한계상황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그런 와중에 경배와 찬양이 주가 되는 현대적 예배가 본격화되면서, 예배란 ‘형식’이 아니라 ‘태도’이며, ‘예전’ 보다 ‘삶의 예배’로 강조의 초점이 이동하였고, 예배의식 자체에 대한 경의가 약해진 것 또한 사실이다. 소위 찬양예배에서 은혜를 받은 젊은 세대들은 ‘묵도에서 축도’로 끝나는 전통적 예배를 형식적인 예배로 규정짓고, 오히려 찬양과 기도와 말씀이 자유로운 무형식의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로 추앙하는 듯한 인상을 받곤 하는데, 과연 이는 온당한가? 


무형식 예배의 정형화

근래 몇몇 찬양예배들과 그와 연관된 예배 컨퍼런스에 참여하며 느낀 것은 ‘무형식이 형식’이 아니라, 이런 예배에도 무언가 형식이 생겨 버린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정형화는 무섭다. 체계가 서 간다는 긍정만큼이나 ‘본질의 변질’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 위주의 현대찬양예배를 한번 참석해보라. 먼저 조용한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예배팀이 무대에 등장한다. 센터에 기타를 맨 인도자가 자리를 잡고 간단한 멘트나 리딩으로 자연스럽게 찬양을 부르며 예배가 시작된다. 참여자들은 눈을 감거나 손을 들기도 하고, 친절한 화면의 가사를 따라가며 찬양한다. 센스티브한 영상팀은 무대와 회중석을 고르게 비추어 주며 예배로의 몰입을 돕는다. 간주나 자유로운 연주가 시작되면 회중들은 자연스럽게 기도를 하기도 한다. 빠른 노래를 부를 때면 박수도 치고 몸도 흔들고 함성도 지르고, 특히 간주 때는 마치 콘서트 장을 방불케 하는 박수와 함성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유도한다. 템포나 스타일에 따라 몇몇 곡은 뛰면서 노래한다. 이쯤에선 거의 락 공연장이 무색할 지경이다. 역시 자연스럽게 목사의 메시지가 이어지고, 설교 이후 기도와 찬양을 적당하게 드리며 예배를 마무리 한다.


각자에게 맞는 예배 형식을 인정해야

과거 전통적 예배의 경직성이나 표현의 제한성이 예배자의 ‘평준화’에 이바지했다면, 이런 자유로운 형식의 예배에서는 분명한 편차가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표현이 많은 사람은 성숙한 신앙인, 혹은 훌륭한 예배자로 보이고, 표현이 소극적인 사람은 훈련이 안됐거나 미성숙한 예배자로 취급된다는 점에 있다. 사실 손을 들거나 뛰거나 하는 표현의 유무는 신앙의 문제라기보다 성향이나 문화적 경험에 따른 경향성의 차이로 볼 여지가 많다. 필자 역시 한두 해 전만 하더라도 뛰는 게 너무 어색해서 집에서 연습했을 정도다. 한발씩 번갈아 뛰는 게 좋은지, 두 발로 방방 뛰는 게 좋은지 말이다. 

현대 예배 또한 정형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마치 과거, 전통적 예배 시간에 박수를 치는 것을 불경건한 행위로 보인 것이나, 정장을 입고 온 사람이 티셔츠를 입고 온 사람을 저급한 신앙인으로 규정짓는 우를 범하는 것과 진배없을 지경이다. 이러한 ‘역정죄(逆定罪)’의 위험성을 숙고하지 않은 예배 혹은 예배자라면 ‘예배의 중심'으로부터 유리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기억하라.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과 표현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예배의 형식이 분명히 있을 수 있고, 우리는 서로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 할 때가 왔다. 서로의 예배 형식에 좀 더 너그러워지기를, 더 나아가 기꺼이 참여하여 좋은 점을 인정하고 맛보아 알아가길 바란다. 또한 형식과 본질의 우위를 논하기보다, 형식과 본질이 어우러진 온전한 예배가 날마다 드려지기를 기도한다.


민호기|소망의 바다 사역과 함께 찬미선교단 리더로, 대신대학교 교회음악과 교수로, 오늘도 세상과 소통하는 음악을 위해 밤새워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