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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영화 속 현실과 만나다

자본주의의 민낯을 보여드립니다│<시스터(위르실라 메이에, 2011)>



자고로 비극이라면 류승완 감독의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 거나>의 엔딩처럼 새하얀 눈 위에 시뻘건 피를 뿌려주어야 그 비장미가 극에 달하는 법. 그러나 여기, 온통 새하얗게 뒤덮인 알프스의 설원 위에 피 한 방울 떨구지 않고도 가슴을 시리게 하는 남매 이야기가 있다. 2012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특별은곰상을 수상하고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되며 화제를 일으킨 영화 <시스터> 속 남매, ‘루이’와 ‘시몽’의 이야기다. 

흥정의 달인, 시몽
12살짜리 꼬마 도둑 시몽은 케이블카를 타고 스키 리조트에 올라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관광객이 설원을 즐기는 사이, 시몽은 스키장을 돌며 능숙한 손놀림으로 관광객의 물건을 훔친다. 훔친 가방에서 건진 빵, 음료 등으로는 끼니를 대신하고, 고글, 스키, 장갑 등 값나가는 물건은 잘 손질해 관광객들이나 또래 아이들에게 되판다. 시몽의 장터에는 늘 사람이 붐빈다. 제대로 스키를 타본 적 없고 탈 줄도 모르는 시몽이지만 장비의 성능만은 줄줄 꿰고 있어 홈쇼핑 호스트보다 더 능숙한 말솜씨로 물건을 돋보이게 한다. 가격을 흥정하는 시몽의 모습은 영락없이 수완 좋고 노련한 장사꾼이다. 

그런데, 사랑도 흥정이 되나요?
그러나 주머니 두둑이 돈을 쥐고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 오면 비루한 현실이 기다린다. 시몽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지만 철딱서니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루이는 시몽이 훔쳐온 빵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시몽이 훔쳐온 옷을 입으며 좋아한다. 게다가 시몽이 힘들게 벌어온 돈은 데이트 비용으로 몽땅 날려 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시몽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루이의 무관심이다. 시몽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안중에 없는 루이는 오로지 시몽이 돈을 줄 때만 시몽에게 다정하게 군다. 하루하루 되는 대로 살아가는 루이 탓에 늘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사정이건만 시몽은 절대 누나를 탓하거나 나무라지 않는다. 왜냐고?
“돈은 다 가져도 돼. 난 없어도 돼. 누나의 동생이면 돼.”
바로 하나뿐인 가족이자 누이인 루이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다. 누나의 사랑을 받는 대가로 늘 돈을 지불한 시몽은 루이의 시간과 다정한 손길을 돈으로 흥정한다. 시몽이 스키장에 놀러온 다정한 영국 여인 크리스틴에게 모성애를 느끼며 그 보답으로 돈을 지불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당연하다는 듯 행동하는 남매의 관계와 행태는 콩가루만 날리는 게 아니라 기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억지로 변명을 하자면 루이에게도 할 말은 있다. 시몽이 돈을 벌어오는 것은 루이가 시킨 적 없는 자발적인 행동이다. 게다가 루이 또한 제 코가 석자인 처지다. 한 번도 제대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또 어떻게 주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자신을 현실에서 도피하게 해줄 남자를 찾아 매번 남자친 구를 갈아 치우는 루이에게 시몽이 벌어다 주는 돈은 손 쉬운 벌이이자 탈출구다. 그렇기에 루이를 자신의 곁에 붙잡아 두고 싶은 시몽은 늘 이 흥정에서 질 수 밖에 없 다. 루이 앞에서만큼은 노련한 흥정꾼 시몽도 적자만 늘어가는 빈털터리,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 아이일 뿐이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흥정하고 있나요?

그런데 흥정을 벌이는 것은 루이와 시몽뿐만이 아니다. 리조트 식당 직원인 마이크는 식당 창고에서 시몽을 붙잡고도 돈벌이를 위해 양심을 팔아 범죄의 공모자가 된다. 시몽이 내놓은 물건이 훔친 것임을 알면서도 싼 값에 싸기 위해 모른 척하는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양심, 가치관, 체면을 부침개 뒤집듯 뒤집는 것은 바로 ‘돈’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뿐이랴. 오늘도 사람들은 돈이라는 케이블카를 타고서 동경의 세계와 그에 못 미치는 현실을 오르내리지 않는가. 모든 것이 화폐로 전환되는, 그래서 급기야는 흥정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들을 흥정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적나라한 민낯. 물질만능주의가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 버린 이 사회에서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가깝게는 합격을 사고(자기소개서 대필), 아름다움을 사며(성형), 체면을 사는(값비싼 혼수, 예물) 광경을. 멀게는 폭력을 사고(민간군사기업 컨택터스), 명예를 사며(공천헌금), 진실을 사는(언론 장악) 광경까지. 지금 당신은 무엇을, 무엇으로, ‘흥정’하고 있는가.
루이의 도피가 잦아질수록 사랑을 두고 흥정하는 남매 각자의 셈법은 점점 복잡해지고, 급기야 시몽이 그동안 고이 숨겨두었던 남매의 비밀을 루이의 남자친구 앞에서 발설하며 상황은 셈 자체가 불가능한 데로 치닫는다. 이야기의 결말은 영화에서 확인하기 바란다. 그러나 더 이상 돈을 매개로 하는 사랑의 흥정이 없으리란 것만은 말해줄 수 있겠다. 가장 지혜롭고도 남는 장사는 결국, 결코 흥정할 수 없는 무엇을 간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 최새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