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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영화 속 현실과 만나다

환상적인 쇼의 세계로 초대합니다│<시카고(롭 마샬, 2002)>



“이건 서커스요. 서커스란 말이요. 재판, 이 세상, 모두 쇼
의 세계요. 그렇지만 이건 확실한 스타와 하는 서커스요.” – 극 중 빌리 플린의 대사


브로드웨이 걸작 뮤지컬을 영화화한 <시카고>는 1920년대 
격동기의 무법 도시 시카고를 배경으로 로맨스, 범죄 스릴러, 법정 영화 등 장르를 넘나드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뮤지컬 영화답게 화려하고 관능적인 안무와 무대의상은 관객의 눈을 한시도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재치 있는 가사와 농염한 재즈 선율은 귀를 즐겁게 한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영화 <시카고>는 등장인물 간에 벌어지는 사랑과 배신, 욕망과 질투, 진실과 거짓의 파노라마를 그린다. 그리고 주인공 록시 하트의 환상 속에서 펼쳐지는 ‘쇼’를 통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쇼’ 의 축소판을 그려낸다. 일찍이 셰익스피어는 말하지 않았던가. 이 세상은 하나의 무대이고 인간은 배우라고.

초라한 현실을 환상으로 위로하다
결혼 전 나이트클럽의 코러스싱어였던 주인공 록시는 화려한 무대 위에서 주목받는 스타가 되길 꿈꾼다. 정비공인 남편은 록시에게 순정을 다하지만 록시를 스타로 만들어 줄 능력은 제로다. 록시는 클럽 무대 위에서 화려한 무대조명을 받으며 노래하는 대스타 벨마 켈리를 동경한다. 하지만 언제나 관객석 기둥 뒤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만 할 뿐이다. 환상 속에서 록시는 켈리가 되고, 온통 블루, 레드, 화이트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춤을 추고 노래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다. 무채색톤에 저채도의 비주얼로 표현되는 단조롭고 초라한 일상을 견딜 수 없는 록시에게 화려한 환상은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모르핀이다.
그러던 어느 날 록시는 클럽의 사장과 친한 사이라며 다가온 프레드의 거짓말에 넘어가 그와 내연의 관계를 맺는다. 무대에 설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푼 기다림의 나날들. 그러나 프레드의 말이 거짓인 것을 알자 좌절감에 휩싸인 록시는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 감옥에 들어간다. 아이러니하게도 본격적인 쇼는 바로 여기서부터 펼쳐진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평범한 록시의 삶. 그러나 살인을 계기로 록시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환상은 더욱더 화려해진다. 감옥은 록시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폐쇄된 공간이지만 오히려 록시가 바라던 대로 그녀를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어주는 화려한 무대가 되고, 그녀는 그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앙큼한 록시, 노이즈 마케팅을 터득하다
록시는 간수인 자칭‘ 마마’를 매수해 최고의 변호사인 빌리 플린을 소개받는다. 대중과 언론이 무엇을 원하는지 간파하고 있는 빌리는 평범했던 록시의 과거를 온통 거짓으로 꾸며대어 언론에 흘린다. 다음날 모든 신문은 1면에 ‘미녀 살인범’이란 헤드라인으로 록시의 이야기를 싣고, 록시는 그토록 바라던 대중들의 스타로 떠오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남편과 부정을 저지른 여자들을 모조리 살해한 키티 벡스터가 감옥에 잡혀 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언론의 관심은 록시가 아닌 키티에게 쏠린다. 심지어 빌리마저 록시를 본체만체하며 키티의 변호를 자처하자 록시의 마음은 질투심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이미 대중의 관심을 얻는 방법을 터득한 록시는 기자들 앞에서 아기를 가졌다는 돌발 발언을 함으로써 관심을 되찾는다. 물론 아기를 가졌다는 건 거짓말. 늘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길 바라는 록시는 무죄판결을 받아 대서특필되기를 기대하지만, 정작 무죄판결을 받는 순간 또 다른 살인 사건이 벌어지면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만다. 
록시가 스타로 떠오르고 한순간에 추락하는 과정은 화려한 연예계의 어둡고 초라한 뒷모습, 그리고 언론과 연예계의 관계를 풍자한다. 기획사가 소속 연예인의 이야기를 각색하여 언론에 흘리면, 언론은 이를 더 자극적인 프레임으로 짜 맞추어 대중에게 전달하며 담론을 만들어낸다. SBS의 간판 예능프로‘ 강심장’은 자기 PR의 진화된 버전을 보여준다. 언론에 흘리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연예인 자신이 직접 피켓에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나와 이야기하는 것이다. 층층 계단에 앉혀야만 할 정도로 많은 출연자는 저마다 자극적인 에피소드를 들고 나와 각축전을 벌인다. 평범한 이야기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는 혹평을 받으며 묻히기 일쑤다. ‘급조된 냄새가 나는데요?’라는 사회자의 말에는 대중의 관심을 받기 위해 거짓이 난무하는 곳이 곧 연예계임을 시청자도 알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화려함, 그 덧없음에 대하여
노출, 스캔들, 자극적인 에피소드 등등. 장기적으로는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쏟아져 나오는 스타 틈바구니에서 대중의 주목을 받기 위해 연예인들은 그렇게‘ 노이즈 마케팅’에 발을 들인다. 이 또 다른 록시들을 향해 극 중 빌리는 촌철살인의 대사를 날린다. “당신은 일회용 스타이자삽시간에 잊히는 한순간 물거품이요. 그런 세계가 시카고요.” 그런 세계가 어디 시카고뿐이랴. 서두에서 영화 속 배경인 시카고가 이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연일 화려한 쇼가 벌어지는, 웬만한 자극에는 도통 무감각한 세계. 그래서 아무리 화려하고 스펙타클한 쇼라도 한 치 앞을 기약할 수 없는 이 거대한 쇼의 세계. 어둠이 빛을 돋보이게 하듯이 <시카고>에서 화려함의 절정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그렇게‘ 모든 것은 변하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를, 인생의 덧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최새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