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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13 01-02 이즌 쉬 러블리

이즌 쉬 러블리 7│빈자리를 채워 반짝반짝 윤을 내는 삶 - 카페 버스 정류장, 박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십 년이 되도록 교사로 학생을 가르치며 연극반을 꾸려 운영해왔고, 연극반 교사 모임을 만들어 극단을 세워 공연도 하고 연수를 받을 수 있게 돕기도 했다. 그러다 농사를 지으러 갔다. 빈집을 찾아 들어간 곳에서 동네 어르신과 먼저 내려온 귀농인과 함께 농사를 짓고 삶을 나누며 살았다. 다시 그곳을 떠나 와 카페를 차리고는 커피를 내리며 월세를 벌기 위해 다시 학교를 찾아 학생들에게 연극을 가르치며 산다. 학생에게도 학교를 선택하지 않은 두 자녀에게도 ‘그래? 그래!’라고 답해주며 아이들이 ‘자기가 좋은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요구할 줄 아는 삶’을 살기 바라면서. 글·사진 원유진

빈집에 깃들다

우연도 겹치면 필연이 된다고 했던가. 점촌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자다 깨어 본 빈집, 특이하게 생겼다 생각하고 지나쳤지만 두 번째 눈을 떠서 마주했을 땐 들어가서 봐야겠더랬다. 오래 비어 있어 주인도 문을 열어 놓은 집이었다. “여기가 6년이 비어 있었잖아. 2층에 올라가면 십자가도 보이고 마당 뺑 둘러서 집이라 영주가 된 기분이 들 정도로 넓고 큰데, 캄캄했잖아 이 넓은 집이.” 학생들이 몰래 들어가 모여 담배를 피던 곳이라 동네에선 우범지대로 보던 곳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타지 사람인 박계해는 이 막막한 곳에서 꿈을 꾸었다. “다 돌아봤는데, 이 집에 완전 가버린 거야. 이 집에 살고 싶은 거야. 구경하는데 나도 모르게 카페가 머릿속에 차려지는 거야. 이거는 가정집으로 내가 살기에는 너무 크고 추웠거든. 그때는 위에 진짜 아무 것도 없고 먼지가 켜켜이 있고 마룻바닥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느낌이 오더라고.”
딸을 설득해서 집을 얻고, 청소를 하고 페인트칠을 하며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빈집에 불이 들어오고 어떤 여자가 딸이랑 둘이서 내내 쓸고 닦고, 머리에 페인트 묻히고 김밥 먹으러 다니는 걸 보며 동네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카페할 거란 소문이 돌자, 언제 열거냐고 물어보더니 알음알음 소문이 나서 이렇다 할 개업식을 하지 않았는데도 손님이 찾아왔다. “주변 사람한테도 불이 들어오니까, 자기들도 이 집이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나 봐. 캄캄했던 이 넓은 집에 불이 들어오니까. 앞집 할아버지가 국화를 탁 들고 나타나셨어. 인사말이‘ 캄캄했던 집에 불이 들어오게 해주어서 고마워요’야. 나중에는 외지에서 누가 오면‘ 우리 동네 카페 가자’하지. 자기들이 갈 데가 없었는데 와 보니까 딴 데 보다 안 떨어지고 다방보다 좋으니까. 차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진짜 많이 받았어.”
빈집에 빛을 켜자 사람이 찾아와 자리를 채웠다. 부산에서 알고 지낸 사람들, 민들레 독자 모임 하던 사람들이 찾아와 하룻밤 묵고 갔다. 시낭송 모임이 생겼고, 연주회가 열렸고 노래를 불렀다. 며칠 전에는 프로포즈를 돕기도 했다. 카페 입구에는 유채꽃을, 마당에는 청보리를 심었다며 봄이 오면 훨씬 예쁠 거라는 귀띔, 마당이 넓어 야외결혼식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카페 버스 정류장은 조금씩 제 색을 찾고 있었다. 귀농에 이어 카페까지, 이렇게 꿈을 이룬 것일까?



제 그릇 만큼만 살기
“난 꿈이 없거든. 왜냐면 나는 뭐가 하고 싶으면 그렇게 했으니까 어찌 보면 꿈을 산 거야. 그런데 생각해보면 난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지 않았던 거야. 난 귀농하고 싶어서 했고 카페 차려야겠다 해서 차렸고, 그 수준 밖에 안 되는 거야 내 야망이란 것이.” 덧붙여 박계해는 제 그릇답게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빈집에 깃들다>라는 책을 쓴 것도, 육체노동이 주를 이루는 농사일에서 글을 놓치기 싫어 쓴 일기를 묶어낸 것이라고 했다. 요즘은 카페의 일상을 여성주의 저널<일다>에 연재하고 있다. “나는 깊이가 있는 철학적인 글은 못 쓰고 사소한 거밖에 없어요. 다양한 그릇에 다양한 음식을 담듯이 나도 나만한 그릇에 나 정도. 나는 이만한 인간이니까 이만한 발자국 하나 내는 거지.”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아 그만큼씩 사는 삶이 가능한데도 우리는 자꾸만 포기하면서 더 어려운 길을 걸으려 한다. 그래서 나는 박계해의 삶이 부럽다고 했다. "이게 옳은 거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돼. 이런 삶은 태만한 삶이고 나는 게으르고 태만한 사람이야. 누군가가 나를 흉내 내려고 좋아 보인다 하면 안 된다니까. 이건 바람직한 삶이 아니야. 나는 이런 사람인거고 이런 사람인 걸 어쩔 수가 없는 거야. 사람들이 내 삶에 관심 있어 하니까 나는 이렇게 살아요,지 이렇게 되세요는 아니거든. 남들이 그렇다니까 행복한가 보다 하는 거지. 나는 나한테 행복한가 질문하고 안 그래. 그냥 사는 거지. 열심히도 안 살아. 그냥 연탄을 열심히 갈지.”



“자고 가도 돼요.” 네? 문득 아찔해졌다. ‘거리가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였구나. 카페 버스정류장은 주인의 마음이 고
스란히 남아 구석구석에서 나를 잡아끌었다. 그래도 집에 가서 일을 해야지, 결심을 하려는데, '연탄불에 양미리를 구워내라’는 말에 그만 포기했다.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 막차를 보내고 잠이 들었다. 400원 짜리 연탄 두 장, 나를 위해 특별히 더 넣었다는 말은 또 어찌나 정감 깊은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오래 머리를 굴렸다. 다시 찾아갈 날을 셈 해보며. 틀림없이 자고 올 거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