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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13 05-06 이 부부가 사는 법

이 부부가 사는 법 1│당신이 나를, 내가 당신을 돌보며








사람들은 나이 40을 중년이라고 부른다. 영성가와 심리학자는 중년 시기에 찾아오는 위기를 인생에 있어 두 번
째 여행의 시작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 여행은 여정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 예기치 못하는 가운데서 시작한다. 아주 불확실하다. 과거의 경험을 기초로 해석할 수 없는 일들이 솟구치는 시기이다. 이런 중년 위기는 실패한 사업, 전쟁의 폭력, 깊은 외로움, 고칠 수 없는 질병 등으로 불쑥 찾아온다. 중년 여행은 불안에 떠밀려서, 실패의 억울함으로 그리고 당혹스러움으로 출발한다. 준비된 여행이 아니니 당연히 어디로 갈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여행은 삶의 의미를 찾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흔들리고 아파하면서, 잃으면서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를 묻는다.

칼 융은 중년을 인생의 기점으로 말하며 그 이전을 오전으로, 그 이후를 오후로 구분하였다. 그는 오후의 삶을 오전에 유용하던 방법이 전혀 유용하지 않은 시간이라고 하였다. 오전에 추구하던 것들은 오후가 찾는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융이 알지 못했던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전이든지 오후든지 하나님의 뜻, 곧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은 오전의 방식이 오후의 삶에 풍성함을 더하여 준다. 오후에 오는 일들이 전혀 새로운 일이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것은 아니었다. 나의 삶을 위기로 던진 오후가 오전의 삶에서 많은 도움과 위로의 손길을 보내줬다. 겉으로 보면 내가 혼자서 가야 할 나른한 오후의 길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오전에 만났던 많은 중보자와 함께 걸을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다. 비록 오전의 삶에 경험해 보지 못한 아픔과 당혹스러움이 밀려왔지만 혼자서 걷는 길은 아니었다.

내가 중년에 들어서던 해에 아내가 질병으로 쓰러졌다. 불시에 찾아온 질병은 내 삶의 방식을 바꾸었다. 이전에는 나를 돌보던 아내가 이제는 내가 돌봐야 하는 아내로, 서로의 역할이 바뀌었다. 이 질병은 아내와 내가 맺었던 부부관계에서, 나를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로 돌변하게 하였다. 먹여주고, 돌봐주고, 씻겨주고, 안아주고, 자세를 바꿔주고, 침을 닦아 주어야 하는 보호자가 되었다. 내 아내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다. 화상을 입어서 다리를 하나 잃은 뇌병변 1급 장애인이다. 장애는 낫는 것도 아니다. 이런 삶에서 호전된다는 것은 회복이 아닌 악화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소멸될 가능성이 큰 환자다. 소멸될 위험에서 붙들어주는 것이 바로 간호다.
남편인 나는 아내를 돌보고 아내와 함께 삶을 살아간다. 아내를 집안에 가만히 두면 환자가 된다. 그러나 비록 병들었어도 아내를 배우자로 인정하고 나의 삶의 영역으로 동행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병이 있는 환자지만 한 인간으로 존중받으며 살아간다. 병든 아내 곁에 머물며 말 건네는 것도 사랑이지만 아내가 나와 함께 움직이는 것도 사랑이다. 온전한 하나 됨을 바라며 아내 곁에 머물지만 동시에 아내가 맺었던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것도 아내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축복의 시간이다. 나는 아내와 함께 나들이 가기로 결심하였다. 아내로서 아무런 역할을 못해도 내 옆에만 있으면 된다. 나는 환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내 삶의 일부 영역에 아내를 동참하게 하였다. 수고 없는 사랑은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내가 건강할 때도 난 자주 아내를 외롭게 하였다. 사역에 대한 열정과 비전을 빙자하여 아내
를 혼자 있게 했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역자가 그러하다. 빌리 그래함과 루스 그래함은 부부로서 30년 이상을 살았다. 어느 날 빌리 그래함이 어느 구역에서 가정에 대한 설교를 하였다. 함께 있었던 아내에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물었다. “내 설교가 어땠어?”라고. 아내가 대답했다. “한 가지만 제외하고는 참으로 훌륭한 설교였어요.” 빌리 그래함이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오.” 루스 그래함은 대답했다. “시간조절이지요.” 그래함은 놀라서 물었다. “뭐라고요? 시간조절!”. 아내의 말에 의아하게 놀라는 그래함에게 루스는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당신은 아내의 남편에 대한 의무에 대해서는 11분을 설교하셨지요. 그러나 남편의 아내에 대한 의무는 겨우 7분밖에 소모하지 않았어요.” 내가 그랬다. 살수록 아내의 일은 늘어났다. 그러다가 아내가 쓰러지고 난 뒤, 모든 일이 내게 쏟아졌다. 그러나 난 내가 직접 하기보다는 돈을 주고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집안일을 맡기고 싶었다. 그들이 아내를 돌봐주기를 바라고, 아이들도 양육해 주기를 바랐다. 아내 옆에 있으면, 가정에 있으면 꿈이 없는 사람 같고, 죽은 사람 같았다. 그러나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얻은 깨달음은 이런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다. 내가 갈등하는 시기에 집사님 한 분이 늦은 밤에 찾아왔다. “목사님, 사모님이 제일 원하는 게 뭘까요?” 나는 어리둥절했다. 약간은 더듬거리며 “글쎄”라고 대답했다. 속으로 “뭘 원해, 일어나길 원하겠지”라며 피곤한 목소리를 삼켰다. 집사님은 단호하게 아니란다. 사모님이 원하시는 것은 “목사님이 함께 계시는 것이죠. 맞죠, 사모님”이라고 강하게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눈을 찔끔한다. “저것 봐요.” 마치 두 사람이 서로 미리 맞춘 것처럼 대답한다. 아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남편이 옆에 있는 것이다. “사모님, 목사님이 곁에 계시는 것이 가장 좋지요.” 아내가 감은 눈을 꿈쩍하고 움직인다. 반복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연속적으로 찔끔한다. “목사님, 봐요. 사모님이 목사님이 옆에 있기를 원하시잖아요”.
부부는 시간이 지나도 한 몸이다. 부부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으로 부름 받은 존재이다. 폴 투르니에는 “질병이 세상과 경쟁에서 뒤처지게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적한 곳을 찾을 수 있는 기회와 유익한 자기 성찰의 기회,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질병이 나를 아내 곁에 머물게 하고, 내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내가 아내를 돌보지만 동시에 나도 아내로 말미암아 나를 돌볼 수 있는 삶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비록 이 많은 것들을 누리며 살아도 아직도 나는 “내 아내는 내 인생의 기쁨”이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아직은 기쁘지 않으니까. 그러나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을 내 삶의 온전한 일부로 받아들이고 아내는 내 기쁨이라고 고백할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내 속에 악한 모습이 여전히 존재해도 임마누엘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나중까지 내 속에 남아 있음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김병년|아내 서주연의 남편이자, 세 아이의 아빠이며 다드림교회 목사다. <난 당신이 좋아>를 통해 아름다운 시 같은 언어의 책을 펴내 자신과 같은 고통 속에 던져져 있는 자들을 향해 큰 위로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