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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영화 속 현실과 만나다

19세기에서 온 결혼과 사랑의 메시지│<안나카레니나(조라이트, 2013)>




고전 문학을 영화화한다는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작업이다. 그것은 영화로 거듭나는 것일 뿐, 이미 우리가 알던고전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감독들은 마치 N극을 가리키는 나침반 바늘처럼 고전에 이끌리고, 또 한 번의 리스크를 감수한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 원작의 <안나 카레니나>에 다시 출사표를 던진 이들은 이미 <오만과 편견>, <어톤먼트>등의 각색 영화를 통해 조화로운 감수성을 보여주었던 조 라이트 감독과 키이라 나이틀리 콤비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작업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측면에서 성공이었지만 그것을 대중이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실패였다. 

이 
영화가 새로운 <안나 카레니나>임은 우선, 원작과는 다른 안나를 창조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그레타 가르보, 비비안 리, 소피 마르소 등 당대 최고의 인기 여배우가 연기했던 ‘안나’에 비해 키이라 나이틀리는 유명세가 떨어지고 호불호도 갈린다. 그녀는 절세미인도 아니고, 현대 미디어가 선호하는 베이글녀는 더더욱 아니며, 타고난 스타성이 엿보이는 배우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 안나가 ‘브론스키’처럼 젊고 매력적인 남자를 사로잡은 것도 섹시하고 육감적인 몸매가 아닌, 러시아 귀족의 도도하고 기품 있는 태도와 특유의 우아함이다. 톨스토이가 의도한 안나와는 다르다. 그러나 한 번도 외도를 꿈꾸어보지 않은 순결하고 고귀한 여성, 부러질 것 같은 허리와 목선만큼이나 나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외도를 ‘사랑’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반항적 이미지와는 매끄럽게 맞닿는다.


더욱 독특한 것은 감독이 관객으로 하여금 ‘안나’라
는 캐릭터 하나에만 집중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먼저, 이 영화는 사실적인 세팅을 쓰지 않고, 공연 무대와 같은 미장센을 추구한다. 파티장에서 많은 사람이 음악에 맞춰 똑같이 움직이다 멈추곤 하는 연기도 그러한 미장센의 일부다. 당장 같은 제작사(워킹 타이틀)에서 만든 <레미제라블>을 떠올리게 하지만, <레미제라블>에서는 ‘싱 스루’ 뮤지컬이라는 형식이 오히려 그 생소함을 무마했던 반면, <안나 카레니나>의 세팅과 진행 방식은 관객의 몰입을 상당 부분 떨어뜨린다. 일반 영화에서 장면이 바뀌는 것을 커다란 무대에서 층을 옮기거나 커튼이 올라가거나 문이 열리는 것 등으로 표현한 의도는 쉽게 가늠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연출이 영화의 입체성을 부러 떨어뜨리고 좀 더 냉정하게 인물을 바라보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안나와 브론스키 외의 캐릭터에게서 결혼과 사
랑, 삶에 대한 다양한 가치관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주목해 볼만하다. 안나에게 깊은 상처를 입은 후에도 끝까지 도리를 지키고자 하는 카레닌, 남편의 외도를 참아내며 가정을 지키는 것이 사랑이라고 자위하는 돌리, 불같은 사랑에 데인 후 자신만 바라봐준 남성에게 돌아가 진정한 행복을 찾는 키티 등은 우리 사회에도 공존하고 있는 사랑에 관한 다양한 처지를 대변한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에서 몹시 순수한 인물이며, 시시비비와는 거리가 멀다. 안나의 자살로 ‘외도의 말로는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일방적 교훈을 전달하기보다는 여러 주변 인물을 통해 현대에도 동일하게 존재하는 사랑의 유형과 방식을 돌아보게 만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캐릭터와 비현실적 세팅이 자극적 섹슈얼리즘과 하이퍼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동시대 영화의 흐름과 정 반대에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 부분이 조 라이트 감독이 진정 의도하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톨스토이의 원작 <안나 카레니나>가 전형적 멜로드라마 형식을 빌려 당시의 제도적 모순과 귀족의 위선을 비판하고자 했다면, 조 라이트 감독은 그러한 주제 의식을 삐딱한 영화적 형식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극영화가 픽션임에도 불구하고 핍진성에 집착하는 것 역시 하나의 위선일 수 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21세기 첫 <안나 카레니나>는 ‘결혼’과 ‘외
도’의 주제를 재조명한다. 사랑의 열정과 주변의 시선 사이에서 점점 괴리되어 가는 안나는 일견 가여워보인다. 꽃다운 10대에 정략적으로 결혼한 데다 사교계에서 외도가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시절, 그 외도를 굳이 ‘사랑’이라고 말해야만 했던 순진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는 로맨스에 한없이 관대하고, 사랑이라는 이유가 오만가지 허물을 덮는 시대다.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으며, 평생 싱글로서 삶을 즐길 수도 있다. 때문에 또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스스로 선택한 결혼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더욱 파렴치한 행위일 수밖에 없다. 논리적으로 볼 때, 우리 시대의 결혼 서약은 더욱 신중하고 신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만약,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만
큼, 감정 또한 아랑곳 하지 않는 세태 때문일 것이다. 외도는 현대에 와서 개인이 제도적 틀을 벗어난다는 측면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윤리적 문제를 더욱 부각한다. 나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배우자를 비롯한 주변인의 감정을 상관하지 않는 태도는 여전히 용서받기 어렵다. 이것은 안나의 파멸이 자업자득이라고 비아냥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며, 바로 이 부분이 이 작품이 지니는 시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열정적 사랑보다 가정을 택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여주인공과 사랑하는 여인이 남편과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카사블랑카>의 남주인공이 오래 가슴에 남는 것은 그들이 보여준 책임감과 타인에 대한 배려 때문일 것이다. 해석은 관객의 몫이겠지만, 에로스와 결혼, 둘 다 판타지로 남기기에는 현실이 녹록지 않다. 윤성은( EBS 시네마천국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