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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한페이지 단편 소설

조립식 아빠가 생기다

“딩동.” 
벨이 울리자 애니는 현관으로 달렸습니다. 하마터면 마루에서 미끄러질 뻔 했지요. 박스는 무거워서 두 손으로 밀어야 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여니, 뽁뽁이 비닐로 서너 겹 칭칭 감겨 있었습니다. 테이프를 뜯어내고 한 겹씩 풀어보았습니다. ‘조립식 아빠-머리 세트.’
만질만질한 머리가 나와 깜짝 놀랐습니다. 설명서를 읽어 보니 검은 비닐 팩에 머리카락이 들어 있답니다. 참, 검은 머리 50퍼센트와 은색 머리 50퍼센트가 섞인 것을 주문했습니다. 주문한 대로 눈은 파란색(다행히 눈알은 끼워져 있었어요), 코는 넉넉한 크기에 입술은 조금 작았습니다. 삼각대가 무료로 왔기 때문에 그 위에 머리를 올려놓았습니다. 가발을 붙여봅니다. 탈착식이라 맘에 안 들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그제야 어색했던 머리가 사람처럼 보입니다. 조립식 아빠는 아직 눈을 감고 있습니다. 


설명서를 읽어봅니다.
‘처음엔 충전되어 있지 않으므로 전원 코드를 연결할 것. 3시간 만에 충전되고, 최대 충전 후 최장 28시간(수면시간 포함하지 않음)동안 사용할 수 있음.’ 
애니는 플러그를 꽂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조립식 아빠를 초기화 중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와! 정말 입술이 달그락 거리면서 말을 합니다. 억양이 너무 밋밋합니다. 목소리 톤은 홈페이지에서 다운을 받으면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이왕이면 국민 아빠로 등장한 전유무가 좋겠지요. 드라마에서 항상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자상한 아빠로 말입니다. 


조립식 아빠의 눈썹이 파르르 떨립니다.
애니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습니다. 눈꺼풀이 올라가고 파란 눈동자가 보입니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립니다. 
“안녕.” 
조립식 아빠가 말을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반가워. 네 이름이 뭐니?”
“애… 애니에요.”
“그렇구나, 애니. 손이 없어서 악수를 못하겠네. 나를 구입해줘서 고마워. 환불 가능 기간은 일주일인 거 알고 있지?”
“아… 아니요. 이제야 알았어요.”
“그런데… 우리 이제 뭘 해볼까?”
“그냥 이야기를 하면 안 될까요?”
로봇 강아지라면 산책을 할 수도 있고, 고양이라면 장난을 칠 수도 있었지만 조립식 아빠의 머리만으로는 이야기밖에 할 수 없습니다. 조립식 아빠의 몸통과 팔을 사려면 돈이 부족했습니다. 머리만 사는 데도 몰래 저금해둔 용돈을 다 써야 했으니까요. 
“좋아. 그거 알아? 음성 녹음 기능을 가동하면 나중에 다시 들을 수도 있어. 스마트 폰이나 컴퓨터에서도 들을 수 있지.”
조립식 아빠의 귀가 파르르 떨립니다.
“얼마나 오래까지 녹음을 할 수 있어요?”
“클라우드 기능이 있으니까 무한대야. 단, 월정액 서비스를 신청해야 해. 월별 결제보다 15퍼센트 싸단다. 결제할까?”
“아… 네.”
“결제 완료. 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애니는 잠시 생각을 해 봅니다. 말을 걸기가 미안할 정도로 언제나 피곤하신 엄마와 아빠 대신에 무한정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조립식 아빠가 코앞에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빠를 가지고 싶었을 뿐이지, 아빠와 어떻게 놀아야 할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진|소설가.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 “하트브레이크 호텔” 한 페이지 단편소설(1pagestory.com)을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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