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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어른이 된다는 것

그녀가 돌아온다

“혜정이 누나 이번주 금요일 귀국이래!” 
우리 셀의 비공식 카톡방은 난리가 났습니다. 한 달간의 국외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셀 리더 혜정이 누나의 귀국이코앞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대체 무엇 때문이냐고요?


혜정이 누나는 교회마다 한둘씩 있다는‘ 엄친딸’입니다. 외
모면 외모, 집안이면 집안, 학벌이면 학벌. 어느 하나 꿀리지 않는 누나가 가는 길이면 어디라도 성령의 빗줄기가 내리곤 했습니다. 생전 화를 낼 줄 모르는 누나는 단 한 가지 경우에만 화를 냈습니다. 누군가 믿음 생활을 불성실하게 할 때였죠. 야리야리한 그녀였지만, 화를 낼 때는 피가 식을 정도로 차갑고 무서웠습니다. 고등학생일 때부터 누나는 교회에서 믿음의 군기반장으로 성실히 소임을 다 해왔습니다. 
누나가 주님의 공동체를 제게 맡기고 미국으로 떠난 1개월 간 우리 셀은 재량 휴가를 보냈습니다. 나쁜 뜻은 아니었어요. 단지, 왠지 모르게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어요.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해보겠느냐’는 생각이었죠. 금요일 오후에 함께 1박 2일로 래프팅을 가기도 하고, 함께 패밀리 레스토랑에도 갔어요. 처음엔 꺼림칙해하던 친구들이었지만, 말 그대로 휴가다운 시간을 보냈답니다. 예배는 다 참석하니까, 은혜는 그때 나누기로 했죠. 뭐, 그래도 식사 기도까지 빼먹지는 않았어요.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혜정이 누나의 귀국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다가왔습니다. 누나에게서 메시지가 한 개 날아왔어요.“ 잘 지내지? 누나 이번 주에 돌아가. 그동안 말씀 나눈 것하고, 기도 제목 정리 좀 해서 부탁할게.” 자기가 없는 동안 셀 리더 일을 잘 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함께요. 오 마이 갓.
그렇게 수요 예배가 끝나고 우리 셀의 비상대책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각자 한 달간의 기도 제목을 적어 내고, 말씀 묵상 내용을 창작하기 위해서였죠.“ 어쩌지. 언니 돌아오면 분명히 이 내용으로 기도해줄 텐데.”
셀 친구 중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깊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벼락치기 방학숙제처럼 써 올린 가짜 기도 제목에 혜정이 누나가 땀 반 눈물 반 흘리며 기도할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던 거지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나마 진솔한 기도 제목’을 적기로 했습니다. 큐티 노트가 있는 친구들은 손쉽게 적어냈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신앙 생활의 성실함 여부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저요? 저는 거의 ‘싸이의 겨드랑이 땀’ 수준이었어요.
먼저 과제(?)를 해치운 친구들이 머리를 맞대고 도와준 덕분에 가까스로 보고자료(?) 작성을 완료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과연 잘하는 일일까’ 하는 의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도통 개운해지지 않는 찝찝함 때문에 누구도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있네요. 원인 제공자는 저였지만, 모두 동의했기 때문에 이런 일도 있게 된 거니까요. 머릿속에 많은 단어가 스쳐 갑니다. 한 달란트를 묻어둔 종, 페이퍼컴퍼니(유령회사), 눈 가리고 아웅, 기타 등등.
“그냥 누나한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안 돼. 그랬다가 언니한테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확신 없는 목소리. 책임지지도, 덮어두지도 못한 채, 혼나기만 싫은 우리. 
“야. 무슨 예수님 재림하시는 것도 아니고, 쫄지 말고 당당히 하자. 이런 게 걱정됐으면 처음부터 똑바로 했어야지. 안 그래?”
저는 어깨에 힘주고 애써 활기차게 말해 봤습니다. “내가 시작했으니까 내가 책임질게. 걱정하지 말아.” 
모임을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상상을 해 봤습니다. 그때는 자료를 위조하지도, 당당히 책임지겠다고 하지도 못하겠지요. 물론, 오늘보다 더 두렵고 떨릴 테고요. 아아. 그래요. 이번 기회는 좋은 교훈이 될 거예요. 회개할 거 회개하고 혼날 거 혼나자고, 앞으로 더 잘하기로 다짐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예수님께 책망 당할 것보다 내일모레 혜정이 누나 보기가 더 두려운 저는 아무래도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나 봅니다.


주동연| 작심삼일을 겨우 넘긴 네번째 날의 오후, 세상을 움직이기보다는 그저 잘 쓴 글 한줄을 원하는, 오타쿠와 초식남의 경계짓기 어려운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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