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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13 09-10 가을밤, 물들다

가을밤, 물들다 6│음악과 사진이 어우러지는 월요일 밤 - 사진과 낡은 전축 워크숍


투명한 유리 벽 밖으로 어둠이 내려앉자 비로소 창 위로 발이 드리웠다. 천장에서 늘어뜨린 조명이 어둠에 온도를 맞추듯 은은해지더니 일순간 카페의 공기가 바뀌었다. 이윽고 조명이 모두 꺼지고 완전한 어둠. 프로젝터에 투사된 어느 뮤지션의 뮤직비디오가 흰 벽을 스크린 삼아 모습을 드러냈다. 영상이 재생되는 동시에 공간을 가득 채우는 음악 소리. 그렇게 ‘사진과 낡은 전축 워크숍’이 시작되었다. 최새롬 · 사진 안미리


안목 출판사, 그리고 사진과 낡은 전축
매주 월요일 밤 8시, 양재동의 한 카페에서 열리는‘ 사진과 낡은 전축 워크숍’은 2009년 설립 이후부터 꾸준히 사진 책을 펴내고 있는 안목 출판사가 사진에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해 마련한 시간이다. 올해 4월, 종로에 있는 ‘김선생사진관’에서 한 달간 단기 워크숍으로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아 7월부터는 지금의 장소로 옮겨 지속적으로 모인다. 입장료만 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데, 재미있는 점은 이 멋진 카페가 오직 이 모임을 위해서만 열린다는 것! 현재는 영업하지 않는데, 카페 사장님이 사진 수업 수강생이었던 인연으로 장소 협찬을 하고 있단다.
워크숍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안목 출판사의 디렉터이자 음악에 조예가 깊은 박군(박재현)이 진행하는 음악 영상 감상회다. 선곡은 전적으로 박군에게 달려있는데, 재즈와 힙합, 펑크와 포크를 넘나드는 폭넓은 장르의 음악을 뮤직비디오나 라이브 영상과 함께 즐길 수 있다. 2부는 안목 출판사의 대표이자 사진작가인 박쌤(박태희)이 진행하는 사진 슬라이드 쇼 감상 시간이다. “사진에 관심 있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사진을 누구한테 보여주고 싶어도 보여줄 데가 없잖아요. 그런 목마름을 느끼는 분들이 사진을 갖고 와서 큰 스크린으로 자기 사진을 보고 난 다음에 참가하신 분들과 같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그렇게 배웠고 그 방식을 통해 제가 사진이나 가치들을 알았기 때문에 그걸 전파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박쌤)
음악과 사진이 어우러지는 밤이라니. 이런 근사한 모임을 왜 이제 알았을까! “어떤 사진을 봤을 때 바로 느낌이 오지 않나요? 음악을 들었을 때도 그렇잖아요. 말보다 앞선, 마음으로 바로 와서 송곳처럼 꽂히는 그런 직접성이요. 감상의 통로 자체가 사진과 음악이 가장 비슷하다고 해서 음악과 사진을 같이 연결한 것이 저희 나름대로 굉장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1부. 박군의 낡은 전축 : 음을 온전히 느끼다
감각적인 영상과 귀를 즐겁게 감싸는 음악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음악에 두 눈과 귀를 온전히 기울인 것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지금은 편하게 프로젝터와 노트북을 연결해 영상을 틀지만, 전에는 청계천 일대를 샅샅이 뒤져 찾아낸 낡은 전축을 가져와 틀었다고. 본 석스 앤 하모니(Bone Thugs-N-Harmony)라는 그룹의 ‘더 크로스로드(The Crossroad)’라는 노래가 끝난 뒤, 들릴 듯 말 듯 읊조리는 말투로 박군이 설명을 덧붙인다. “이게 90년대 중반쯤 나왔는데 빌보드 차트에서 꽤 오랫동안 1위를 했어요. 근데 우리나라에는 앨범이 정식으로 못 나왔어요. 워낙 애들이 거칠고 욕도 많아서. 실제로 갱스터여서 몇 명은 앨범 내고 교도소 갔다가 와서 또 앨범 냈고. 그렇습니다. 하여튼 좋네요. 오랜만에 들으니까.” 처음 들어본 곡뿐인데 모든 곡이 마음을 흔들었다. 이래서 박군의 선곡을 믿고 듣는가 보다. 박식하고도 흥미로운 설명에 감탄! 신청곡은 받지 않는단다. 어쩜, 시크하기까지.


2부. 사진 슬라이드 쇼 : 열린 마음으로 서로 이해하다
이번엔 첫 타자로 나선 참가자의 사진이 흰 벽에 투사되었다. 스무 장 남짓한 사진이 천천히 슬라이드 쇼로 지나가는 동안 모두 말없이 사진을 응시한다. 어떤 사진에서는 감탄사가, 또 어떤 사진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한 바퀴를 돌아 첫 번째 사진으로 돌아오자 박쌤이 말문을 연다. “보여주신 발전의 속도가 놀라울 정도예요. 집중력이라는 것이 보여줄 수 있는 경이로운 결과물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네, 그럼 카페 사장님부터 얘기해볼까요?” 한 명씩 돌아가며 각자가 발견한 점을 자유롭게 나누기 시작했다. 사진을 볼 줄 모른다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따뜻한 격려의 말과 사진의 뒷이야기,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동안 사진을 더 깊이 이해하고 음미할 수 있었으니까.
“저는 이걸 한번 같이 생각해봤으면 좋겠는데….” 박쌤이 부드럽게 이야기를 사진에 대한 진지한 물음으로 이끈다. 각자의 의견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토론으로 이어졌다. 대화를 통해 각자 지향하는 사진 작업의 방향까지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는 박쌤의 깊은 뜻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타인과 나의 다름을 발견하고,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줄 아는 밀도 높은 대화의 즐거움이었다.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요? 서로 다른 걸 본다는 게 너무 좋지 않아요? 그리고 놀라잖아요, 누가 발견하면. 아, 이런 것도 있구나, 아, 저런 것도 있네? 그러면서 우리의 세계가 넓어진다고 저는 믿고 있어요.”(박쌤)


처음 본 이들과 함께 음악과 사진을 나누고 감상하고 대화한다는 것. 그것은 박쌤의 표현처럼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일’이고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기적의 순간을 공유한 우리는 예정된 순서가 다 끝난 이후에도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고 다시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못다 한 이야기를 풀었다. 가을밤에서 이른 새벽에 이를 때까지, 음악과 사진 이야기를 끝없이 풀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