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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살림의 나날

몸으로 살기

“우리 결혼 10주년에는 꼭 미국 가자.”
결혼 10주년에는 남들 다 가본 미국에 가서 친구와 후배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10주년의 봄, 우리의 선택은 제주도였다. 딱 우리 가족만 떠난 첫 여행이었다. 올레길을 걷네, 곶자왈을 가네…. 우리 부부가 하고픈 건 많았지만 5박 6일 동안 우리가 주로 한 건 아이들이 간절히 원했던‘ 승마’였다. 2년 전 부모님 칠순 기념 제주 여행에서 갓 5살, 8살 된 딸 둘이 말을 타고 행복했던 기억을 고이 간직한 덕분이었다. 아이들은 2년 만에 다시 타보는 말에서 내리기를 싫어했고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다음 날도 말을 타려 했다. 거의 매일같이 말을 탔으니 한풀이가 되었거니 했더니 집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승마앓이를 시작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승마클럽이 있는 걸 아는 큰딸은 비교적 만만한 아빠를 들볶기 시작했다.


하지만 승마라는 것은 본디 평범한 서민들이 감히 꿈꿀 수 없는 취미가 아니던가. 부모 맘에 뭐든 해주고 싶었지만 너무 비쌀 것 같아 선뜻 약속할 수 없었다. 그러다 한번 알아는 보자는 심정으로 플래카드에 걸린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다. 비용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절대 시킬 수 없는 금액은 아니었다. 혹 몇 명을 모으면 조금 싸게 탈 수 있을까 싶어 알아보니 의외로 관심 있는 이가 많았다. 간다 하고서 2주가 지나서야 담당자를 만났는데 그 사이 누군가가 기부를 해서 일정 수의 학생을 모으면 반값에 클럽회원이 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날 밤 당장 승마클럽에서 제시한 10명의 인원을 모았다. 그리고 그 주에 바로 승마를 시작했다. 반값으로 탈 수 있는 인원은 채워졌지만 혹여 뒤에 듣고 섭섭해 할까 싶어 학교에서 만나는 엄마들에게 틈틈이 승마 기회를 알려주었다. 그런데 한 엄마가 할인받을 수 있는 인원이 찼는지 모르고 “우리 학교에서 그렇게 많은 애들이 타겠어?”하고 물었다. 이미 수가 찼노라고 했더니 대번에 “우리 학교 엄마들 여유 많네~”하고 대꾸한다.
사실 그렇게 말한 학부모는 아이에게 이런저런 사교육을 많이 시키는 엄마였다. 여유가 없어 피아노 딱 하나 시키고 있다가 아이가 간절히 원해서 큰맘 먹고 승마를 시키는 나로서는 졸지에 여유가 넘치는 엄마가 되는 꼴이었다. 몹시 기분이 상했다. 괜히 말 꺼냈다 싶은 후회도…. 하지만 그 학부모의 반응이 무색하게 얼마 뒤 승마를 하겠다는 인원은 20명을 훌쩍 넘었다.

일이만 원이라도 할인 받겠다는 소박한 심정만 있었지 딱히 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어느새 나는 20명이 넘는 아이들의 학부모와 통화하고 시간대를 정하고 차량을 조율하는 일까지 맡고 있었다. 서로 돕겠다고 성화면 좀 쉬우련만 제각각 이유로 가급적 안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을 붙들고 조율하려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막상 승마를 시작하고 나서는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복잡해질 줄 몰랐던 나는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 값 주고 타고 말지…, 라는 마음이 열두 번도 더 올라왔다. 일에 대한 금전적 보상도 없고 대단한 명예를 가져다주지도 않는, 그러면서도 내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하는 일들. 가깝게는 우리가 속해 있는 크고 작은 모임의 총무들, 학교의 학부모회, 교회의 임직자 등 사회생활에서 자신이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기꺼이 하는 숨은 일꾼이 그렇다.
해봐야 본전인 일을 조용히 묵묵하게 하는 이들 덕분에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덕을 보며 살았던가! 승마 건도 만약 내 역할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맡았더라면 나 역시 그들처럼 누군가의 수고에 숟가락 하나 얹고 갔을 것이다. 아마도….


눈과 입, 머리로 살아갈 때는 쿨하고 멋지다. 내가 손해 보는 게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몸으로 살 때는 나의 옹졸한 맘, 인정에 대한 욕구를 직면하며 끝없이 속상해 하고 좌절한다. 어쩔 수 없이 겸손케 되는 것이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고 한다. 내 삶에 가을이 찾아오면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결실을 보게 될 것이다. 내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소리 없이 가르쳐주는 가을이 1년마다 돌아와주어 참 고맙다. 2학기엔 툴툴대지 않고 조금 더 묵묵히 잘해도 본전인 일 해보자!


이경희|필명 조각목, 소싯적 옷 만들고 책 만들다 결혼 후 마님으로 살면서 음지에서 야매 상담가로 맹활약 중. 바느질에 관심을 쏟다가 목 디스크 때문에 그만두고 페이스북에서 수다 떨듯 글을 쓰다가 최근 작가와 출판전문기획자를 동시에 해보기로 결심함. 여성의전화 소식지 기획위원, 지역신문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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