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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인터뷰

80호_도돌이표와 음표가 동글동글 돌고 있다

뿌리. 두 개의 트럼펫과 하프, 베이스, 피아노, 드럼으로 구성된 6인조 밴드.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악기 구성. 최선배 선생님을 중심으로 모인 재즈앙상블 뿌리는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에서 착안한 이름. 이 작품은 아프리카 작은 마을의 한 흑인 소년이 미국으로 끌려가 노예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고, 이어 2백 년 간 그의 후손이 사는 삶을 그렸다. 작가는 자신의 외할머니에게 들은 아프리카 조상의 이야기를 오랜 시간 기억하고 조사하여 작품을 완성했다. 그로 인해 흑인들은 자신의 ‘뿌리 찾기’에 열정을 쏟았고 그것은 더 많은 사람에게 확대되었다. 지금도 이 작품은 문화공간 ‘반쥴’과 뿌리, 그리고 그들을 찾는 관객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느끼곤 한다. 붙들렸는가 싶으면 떠나버리고, 지속되는가 싶으면 흘러가버리고 소멸되는가 싶으면 간직되어 있는 신비한 어떤 것을. 그 느낌이 만져질 듯 만져질 듯 우리 주변을 감싼다. 그때에 우리는 기쁘면서 애달프고, 허무하면서 뿌듯하다. 이 이상한 느낌을 가장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이 음악의 세계다. _김소연의 <시옷의 세계>에서


다섯 걸음마다 유학원 건물이 서 있는 종로의 밤, 조금만 방심하면 나이트 삐끼가 붙잡는 금요일의 거리. 반쥴에서 열리는 뿌리의 정기 공연에 초대받았다. 그곳은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그들 멤버 중 처음 눈에 띄는 사람은 최선배 선생님이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자기 일을 한다는 것, 게다가 제자와의 함께함이란! 그들의 간극을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자리였고 시간이었다. 첫 연주는 페데리코 펠리니의〈길 La Strada(1954)〉의 테마였다. 오래 전 보았던 영화인데 잊고 지냈다. 주인공 젤소미나의 바보 같고 이해되지 않던 행동이 마음에 애잔하게 남아 있었단 사실을 음악을 들으며 깨달았다. 나는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쳤을 미세한 감정의 결들을 다시 찾았다. 그들을 만나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반쥴 뿌리의 멤버 이기화 씨가 대표로 있는 이곳은 올해 마흔이 되었다. 레스토랑과 홍차 전문점으로 오랫동안 유지되다가 2년 전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세월의 흔적에도 변하지 않은 것은 반쥴이 언제나 문화예술인의 놀이터로 있어주었단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이름 반쥴은 아프리카 감비아 수도이며, 흑인을 사고파는 노예시장이었고, 작품 <뿌리>의 주인공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아픔의 장소만이 예술을 만드는 것이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잊지 못하는 아름다움은 언제나 핍박받는 땅으로부터 왔다. 이곳에서 ‘뿌리’는 두 달에 한 번 정기 공연을 해왔고 3월에는 ‘영화음악’, 5월에는 ‘여행’이라는 주제로 음악을 선곡하고 공연하며 그들만의 이야기를 쌓아가고 있다.



최선배 . 트럼펫 연주자 

독학으로 트럼펫을 시작해 1960년대 초 주한미군(미팔군) 무대의 재즈씬 데뷔. 50년간 트럼펫을 연주했고 지금도 날마다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오른손 연주자였지만 90년대 오른손을 다치고 피나는 연습 끝에 현재 왼손으로 핑거링을 하고 있다’는 인터넷 정보에 대해 “궁여지책으로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그냥 왼손으로 한 번 해보자고 한 것뿐이지”라고 그가 말했다. 미군이 주둔하던 시절, 초등학생이었던 그는 미군을 위한 라디오방송에서 라틴재즈부터 올드 팝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악을 듣고 자랐다. 그때의 음악적 상상력이 그에게 트럼펫을 만나게 했고, 그 기억은 그의 몸통이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가 하고 싶은 음악이 아닌 다른 것을 요구했고 그는 오랜 시간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싸워야 했다. 그는 그렇게 한국 재즈 1세대의 토양을 다졌다. 



이기화 . 하프 연주자

어릴 때 하프 연주를 보고 좋아서 시작했지만, 하프 하면 떠오르는 일반적인 이미지-천사 혹은 공주 같은 화려함-에 실망했다. 자신이 즐겁게 연주해야 듣는 사람도 즐거운데 그녀는 그러지 못한 시간을 보냈다. 전공을 바꾸려던 중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World Harp Congress’에 참석해 터닝포인트를 만났다. 다른 나라의 다양한 하프와 연주를 보고 하프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었다. 가죽 바지를 입은 하피스트가 밴드와 함께 연주하는 장면은 충격 자체였다. 하프가 만들어낸 다른 세계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나이 들수록 하프가 더 좋아지고 공부할 것이 쌓여가고 연주에 대한 욕심도 늘어가고 있다. 그녀가 하프를 연주할 때마다 우리가 알던 세계의 문이 조금 더 넓게 변해가는 듯하다.











김한나 . 피아노 연주와 작 · 편곡

트럼펫 둘에 하프라는 세팅은 그녀에게 무모한 도전이자 굉장한 행운이었다. 악기의 특성을 배워가며 작곡하다 보면 창작의 고통이 뒤따랐다. 그것을 고민하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한결 편해졌다. 더 잘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때마다, 뿌리만의 색채를 만들고 싶지만 뜻대로 안 된다 싶을 때마다, 멤버들의 도움이 있었다. 지금의 멤버 그대로가 충분하다는 것을 이제 그녀는 알고 있다. 요즘은 그녀가 틀을 만들면 다들 각자의 생각을 더해 원래의 것보다 한결 좋은 곡을 만들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뿌리의 바람을 말했다. “한결같이 우리가 사랑하는 것과 삶의 소소한 신비를 지켜주는 마음을 뿌리의 음악에 담고 싶어요. 최선배 선생님 세대의 주옥같은 음악으로 시간의 무게를 발견했고, 젊은 세대의 음악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선생님의 겸손함에서 삶을 배웠거든요. 여러 세대의 다양한 청중과 함께 음악의 뿌리가 되어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싶어요.”



조은정 .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스무 살 때부터 록밴드 하다가 음악을 좋아해서 학교에 가고, 최선배 선생님을 만나고, 재즈가 좋아서 콘트라베이스를 치고, 그러다 공부가 더 하고 싶어서 유학을 갔다가, 돌아와서 이 자리에 있네요.” 그녀의 답은 간단했다. 할 줄 아는 것이 음악뿐이라 말을 길게 하지 못한다 했다. 그래도 궁금한 사람을 위해 더 첨가한다면 유학 다녀와서 최선배 선생님께 인사하러 간 날의 대화를 살펴보자. 선생님이 그러셨다. “베이스가 없다.” 그녀가 답했다. “아. 네. 선생님.” 선생님이 말했다. “내가 악단을 하나 만들었다.” 그녀가 답했다. “네.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대화는 짧고 연습의 시간은 길다. 둘 다 평소에는 심심하고 할 일이 없어서 오로지 연습만을 한단다. 참고로 그녀는 ‘낙타 콧구멍’과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좋아한다.










원익준 . 드럼 연주자

고등학생 때 록밴드에서 드러머가 없어서 얼떨결에 시작. 해군 군악대에 합격하여 배를 타고 13개국 외국 함대를 순항하는 훈련에 참여했다. 당시 응시자 중에는 클래식전공자가 넘쳐났고,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데다 헤비메탈 록을 연주했던 그는 시험에 합격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열차가 어디 예상대로 흘러가던가. 그것은 그를 전혀 생각지 못한 미지의 땅으로 인도하더니 세계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 일을 계기로 더 넓은 세계에서 음악을 배우겠다 다짐하고 3년 후 캐나다로 갔다. 그곳에서 승국과 한나를 만났고 그들은 그를 뿌리에 합류시켰다. 그러고 보니 그는 이따금 얼떨결에 어떤 열차에 오른 사람 같다. 놀라운 것은 그 열차가 언제나 예상보다 멋진 곳으로 그를 안내한단 사실이다.




하승국 . 트럼펫 연주자

그는 유학생 시절 친구들과 매주 토요일 카페에서 공연했다. 그때마다 노신사들은 뒷좌석에서 커피와 베이글을 시켜놓고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공연 마지막 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이었다. 어느 노신사가 다가오더니 자신은 귀를 다쳐서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깜짝 놀라며 그런데 어떻게 공연 때마다 오시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노신사가 하는 말. “음악은 듣는 게 아니고 보는 거예요. 나는 즐겁게 연주하는 당신의 에너지를 보고 느꼈어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마음에 새겼다. 그 역시 최선배의 제자다. 대학로에서 공연을 보고 그 길로 집을 나와 제자가 되겠다고 자청했다. 그는 존경하는 스승과 함께 연습하고 연주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음악뿐 아니라 인생까지 전수받는 그 옛날 무협지의 스승과 제자처럼, 그들은 나란히 앉아 연주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도돌이표와 음표가 동글동글 돌고 있다.



글 . 곽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