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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M 아티스들의 발빠른 변신


새로운 연재를 시작하며 생각이 많아진다. 한국의 음악사역을 염려하는 많은 시각과 목소리 속에서 현장에서 음악사역을 섬기고 있는 이의 목소리는 자칫 어설픈 자기변호로 오해를 만들지 모를 때문만은 아니다. 저마다 현재의 상황과 문제들을 진단하는 견해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럴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지당하신 말씀들은 결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이다.

너무 당연하고 당연해서 그 누구의 마음도 불편하게 할 수 없는, 그래서 그 무엇도 변화시킬 수 없는 말잔치, 글잔치 속에서 또 하나의 공허한 메아리로 그칠까 문득 두려워진다. 당연한 얘기가 당연하지 않게 들려지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다소 불편하게 들리는 당연한 얘기를 시작해 보려한다.
‘에코그라피’라는 제목은 자크 데리다와 베르나르 스티글러의 대담집에서 빌어 왔음을 밝혀둔다. 에코그라피란 주로 의학용어로 ‘초음파 진단’을 의미한다. 따라서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에 문제가 생겼음이 분명한 현재의 음악사역의 내부를 정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겠다. 또 하나, echo라는 접두어에는 필자와 독자, 음악가와 청중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는 중의적 뉘앙스가 존재한다. 필자의 우둔한 외침이 지혜로운 비판의 메아리로 돌아오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결국 말과 글은 상호작용의 매개 아닌가. 마찬가지로 말과 글의 표현력을 극대화한 음악(노래) 역시 상호작용의 결정적 매개 역할로 존재한다.

하나님은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 그의 뜻을 이루어가는 매체로 음악을 사용해 오셨다. 인간 역시 초월적 존재에의 경외감을 표현하는 최선의 도구로 음악을 선택해 왔다. 매개체로써의 음악은 인간의 이성과 감성과 의지와 영성, 이 모두와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면에서 그 어떤 예술형태보다도 종교적이다.
현재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음악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고, 그 언젠가 보다도 음악가가 대접받고 있으며, 또한 그 어느 시대보다도 음악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이 어이없는 역설은 물론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른 미디어의 변화에 기인하는 바도 크긴 하다. 음악을 집중해서 듣기 위해 시간을 내어 오디오 앞에 앉는 것은 이미 옛말이며, 작업이나 게임을 하려 컴퓨터를 켜면 자동으로 음악이 흘러나온다. 애초에 시간성의 예술이었던 ‘음악’이 손쉬운 클릭 몇 번으로 공간화가 가능해진 ‘File’로 개명하며, ‘감상’ 그 자체의 목적보다 우리 삶의 ‘배경(ambience)’으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으며, 찬양을 통한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도 깊은 교통이 결단과 헌신, 실제적 삶의 변화로 이어지기보다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일시적으로 불러일으키는 흥분제 내지는 마취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 실정이다. 음악사역이 ‘메시지 전달’의 본질을 잃고 나니 ‘분위기나 띄우는’ 허울만 남았다. 교회가 찬양을 말씀, 성례, 기도와 동등한 기독교의 요소(element)로 보기보다 단순한 교회부흥의 도구 정도로 인지하는 ‘찬양의 하위개념화’를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요소의 하위개념화는 본질의 변형과 왜곡을 초래한다.

음악사역이 교회에서 중요한 이유는 음악이라는 보편적 예술 매체는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즉, 음악사역은 성도들의 신앙을 독려하는데도 기여하지만, 그와 동시에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달하고 표현하는 최선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세기에 접어든 한국의 음악사역은 급격한 방향선회 끝에 결국 ‘워십(Worship)’ 한 가지 방향으로 자리를 잡은 듯하다. 이는 장르 편중의 극단성이 세계 최고급인 한국 음악계의 관행을 그대로 답습한 것일 뿐 아니라, 복음전파의 지상명령보다 교회 조직의 현상 유지를 더 높은 목표로 설정한 듯 보여 진다. 이러한 예배음악의 강세는 전 세계적 현상이기도 해 이를 두고 쉽게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일’로 속단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 또한 안타깝다.
예배가 이슈가 되고, 예배 관련 상품이 창궐하고(예배가 유행하는 것을 비판하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아이러니까지 포함하여) 모두가 예배‘만’을 얘기하는 워십일변도에는 음악사역자들의 공이 크다.
불과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세상과의 소통 가능성을 밤새워 고민하고, 그들의 음악과 그들의 어투로 그들에게 전할 복음의 진리를 표현하고자 피땀을 쏟아내던 소위 ‘CCM 아티스트’들이 어느 순간 ‘예배인도자’로 발 빠른 변신들을 하셨다.
CCM의 한계를 현장에서 체감한 것도 사실이지만 더 큰 원인은 교회의 방향선회에 따른 기독교 시장의 판도변화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제 밥그릇 지키기에 나선 것이다. 시장을 잠식해버린 컴필레이션 음반이나 워십 음반 수록 곡들의 면면을 살펴보라. 세상을 향한 외침이 상실된 자리에 얄팍한 축복송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복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지 않은가.
본래의 목적성을 상실케 된 원인들을 하나씩 거슬러 오르다보면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의외의 해결책을 마주칠 수 있으리란 믿음으로 연재를 시작하려 한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모든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라 여겨진다. 구조나 시스템, 관행의 문제의 원인을 따지고 들다보면 언제나 그 끝엔 사람이 있다. 음악사역이 빚어낸 문제의 근원에는 음악사역자 본인이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민호기|소망의 바다 사역과 함께 찬미선교단 리더로, 대신대학교 교회음악과 교수로, 오늘도 세상과 소통하는 음악을 위해 밤새워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