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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문화동네 사람들

배우 강신일 ㅣ 치열하게 오늘을 살고 흔들리며 나를 찾다

에디터 정미희


‘누군가의 삶’을 살아내는 배우는 때때로 ‘누군가의 로망’이 된다. 그것이 그 배우의 진짜 모습인지 아닌지는 별개다. 관객의 마음속에는 그저 배우가 살아낸 삶이, 그리고 그 인물이 남을 뿐이다. 누군가 그토록 기다리는 사람, 혹은 되고 싶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배우가 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소중한 주변인으로 머무르며 누군가가 바라는 ‘직장상사’, ‘아버지’, ‘동료’, ‘이웃’이 되었던…. 내 주변에 늘 함께 했으면 하는 인물로 기억되는 사람, 참으로 진중한 배우 강신일을 만났다.


열정과 믿음으로 이겨내다

늘 있었던 듯 자연스레 거뭇거뭇 자리 잡은 수염과 슬쩍 구김이 간 면바지, 티셔츠 그리고 뿔테안경. 스튜디오로 들어서는 그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마치 커피 한 잔 하려고 만난 사이처럼. “이렇게요?”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카메라 앞에 선 그가 조금 초췌해 보여 내심 걱정스러워진다. 조심스레 건강에 대해 물으니 그가 천천히 대답한다. “많이 좋아지고 있어요.”라고. 그는 요즘 홀로 시골에서 지내면서, 4~5시간씩 등산을 하고, 밥을 해 먹고, 또 쉬며 몸을 다스리고 있다. 병원에서도 괜찮다고 하고, 밥도 전보다는 잘 먹고 있다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마음이 조금 놓이는 듯하다.

작년 10월, 그는 처음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라는 생각과 두려움이 잠깐 들었어요. 하루 정도. 곧 아내와 함께 담담히 ‘이것은 그리 심각한 병은 아닐 것이다.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믿었죠.” 그렇게 모든 것을 온전히 그분께 맡긴 채, 12월 초 드라마 촬영 중간 스텝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술을 했고, 2주 만에 현장에 돌아왔다. 그렇게 올 2월, 드라마 <황금신부>를 끝내고, 연이어 <공공의 적 1-1>을 3월 말까지 촬영했다. 그가 심드렁하게 이야기해서 그렇지, 이것은 정말 열정과 믿음이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이번 영화 <공공의 적 1-1>이 힘들게 찍은 작품인데, 관객들 반응이 좋아 위안이 됐을 것 같다고 하니, “그렇죠. 감사하죠. 영화는 건강하고 좋은 에너지를 쏟아서, 몸을 많이 사용해 찍어야 하는 것인데 스텝들에게 염려를 많이 끼쳤어요. 그것이 너무 미안했죠. 미안했어요.”라고 말한다. 설핏 그는 <공공의 적 2>에 부장검사 ‘김신일’ 그대로인 것 같다. 담담히 내뱉는 진심이 담긴 한 마디, 한 마디가…. 약속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첫 마음 잃지 않기

영화 <공공의 적> 시리즈는 대중들에게 배우 ‘강신일’을 각인시킨 특별한 영화다. 연극을 할 때는 지나갈 때 고작 5~6명 정도가 그를 알아봤을 뿐인데, <공공의 적> 한 편을 찍고 나니 사람들이 모두 “영화 잘 봤어요.”하며 알아보더라는 것이다. 연극을 했던 지난 20년의 세월이 순간 허망하기도 했고, 두려움도 찾아왔다. 갑자기 나타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을 다잡고, 연극을 시작했던 첫 마음을 잃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고등학교 시절 동숭교회 연극부에서 처음 연기를 시작한 그는, 그것을 계기로 대학교 때 <증언>이라는 극단에서 막내였지만 주연을 도맡아 하며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극단 <증언>은 세 가지 목적을 두고 공연을 했다고 한다. 기독교문화가 없던 1980년대, 연극을 통해 기독교문화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과 선교와 전도의 목적, 나머지 하나는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 중 유독 그의 마음을 끈 것은 ‘지역사회 봉사’. ‘지역사회’란 이 지역에서 나아가 이 땅, 이 사회, 이 나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는 그렇게 연극을 통해 작게나마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10년 동안 얼마가 벌리든 연극만 하겠다, 꼭 배우가 아니더라도 평생 연극을 하겠노라, 다짐했다. 경제성장시대에 강요받던 ‘경쟁’이 싫어 택했던 연극은 27살에 그의 인생이 되었다.


사회와 소통하는 변화를 꿈꾸다

교회에서 연극을 시작한 그의 첫 신앙생활은 중학교 때 미션스쿨을 다니면서부터란다. 그 때 처음 교회와 성경을 접했던 그는 “성경 과목은 늘 100점이었어요.(하하)”라며 자랑하듯 되뇐다. 이 기억은 교회에 익숙해지는,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그 후 고등학교를 서울로 진학하면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고립되어 지내던 그에게 친구가 교회에 함께 갈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처음 발을 딛은 동숭교회를 그는 지금껏 섬기고 있다. 게다가 1979년부터 1983년까지 5년 간, 청년부 찬양인도를 하기도 했다는 사실! 한 선배가 그의 찬양을 일컬어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복중의 아이가 기쁨으로 뛰놀 듯 했다는 찬사를 하기도 했다고. 그의 연기에서 느껴지듯, 그는 아마 하나님 앞에서도 순전한 사람인가보다.

혹시 하나님 앞에서의 방황은 없었을까. “아직 방황 중이죠.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늘 하니까요.” 그 고민은 연극 속에 담긴 그의 진심, ‘지역사회 봉사’와 맞닿아 있다. “교회가 안으로만 향하며 점점 왜소한 모습으로 변해가기보다 자기의 울타리의 한계를 벗어나 보다 포괄적인 시선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는 안으로 삭히듯 말을 이었다. 소통이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교회도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포용하고 인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나를 찾아가는 여행

그런 소통이 기독교 문화에도 있기를 바란다는 그는, 9월 말에 있을 ‘서울기독교영화제’가 단지 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말하는 전도의 도구로서의 영화제가 아닌, ‘예수’의 정신이 바탕이 된 영화제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문화의 행위자’로서 고민도 함께 털어놓았다. “연극을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문화란 그 시대 그 사회에 예언자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그 행위자로서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연극과 신앙은 닮았다.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게 하는 힘이 연극과 신앙 안에 있으며 자신 안의 예술성과 영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온전한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란 어떤 존재일까. “궁금해요.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영화를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 이외에 ‘나’는 없는가를 고민하죠. 그 고민의 끝에 그 분과 만나게 되지 않을까요?”라고 담백하게 이야기한다. 그는 영화 속의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자신도 몰랐던 자신을 발견해나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하나님과 함께.


작품에서와는 달리 쑥스러움을 유달리 타는 조용한 성품의 그는 분명, 내적으로 충만한 열정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조근 조근 이어가는 그의 말에는 천천히 씹어 삼키고픈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자신이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웃기는’ 재미가 아닌 ‘따뜻한’ 재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난 아직 그대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대 마음에 이르는 그 길을 찾고 있어…’ 요즘 그가 가끔 부른다는 김광석의 <기다려줘>. 그의 마음이 담긴 이 노래를, 듣고 싶다. 나지막하게 마음을 만지는 그의 음성, 착한 손가락으로 튕기는 기타 줄의 소리와 더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