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우리 권사님 소싯적에 2 l 천황 앞에 머리를 숙여라



천황 앞에 머리를 숙여라
-
일제시대, 1920-1945


벌써 일제시대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가 됐네요. 우리나라와 일본이 강제로 한 나라가 되어버린 1910년의 일은 다 아시죠? 온 나라를 순식간에 강탈당해버렸어요. 우리는 경술국치라고 불렀는데, 정말로 치욕적이었지요.




나라의 치욕, 교회의 굴욕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나라의 독립을 되찾고 싶었어요. 그래서 1919년 고종 황제의 승하를 기회삼아 3·1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민족지도자 33인 중 길선주 목사님을 비롯한 17분이 교회지도자였을 정도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어요. 이를 두고 일본 기독교인들은 조선 기독교인들이 구태의연한 구약의 유대민족주의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비난했지요. 자기들은 천황 숭배와 기독교를 구분도 못하는 주제에, 나 원, 어처구니가 없어서….
어찌됐든 이 일로 일본이 깜짝 놀란 것은 분명해요. 그동안 해오던 강압적인 무단정치를 교묘한 문화정치로 바꾸어 갔으니까요. 그리고는 가랑비에 옷 젖듯이 알게 모르게 일본의 정신을 심으려고 했지요. 우리더러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라고 하고(창씨개명), 학교에서는 오직 일본어만 사용하게 했어요. 일본과 우리나라가 하나라나 뭐라나(내선일체)라면서, 아무튼 그맘때 우리더러 신사에 참배하라고 강요를 했어요.
1938년에 평양에서 열린 장로교 총회 때였어요, 강제로 신사참배 안건이 통과된 때가…. 그리고는 많은 어르신들이 저항하다가 감옥에 갇히셨죠. 주기철 목사님처럼 돌아가신 분들도 꽤 됐어요.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은 철로를 놓는다, 비행장을 짓는다, 등등 별별 부역에 다 불려 다니셨어요. 우리더러 헌금을 하라고 강요도 했고요 무기를 만들기 위해 교회의 종을 떼어가기도 했어요. 그렇게 모인 헌금으로 비행기를 한 대 장만했답니다. 그 전투기의 이름이 ‘조선 장로호’였는데, 이 이름으로 전쟁터를 날아다니면서 사람의 생명을 노렸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쳐요. ‘신사참배는 왜 우상숭배인가?’ ‘조국을 위해 교회는 봉사해야만 하는가?’ 한국교회가 이처럼 냉혹한 역사의 물음 앞에 놓였던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평행선을 긋던 교회와 문화

그래도 떠올리면 웃음이 배어나는 일들도 많았지요. 1936년에는 양정고보 김교신 선생의 제자였던 손기정 오빠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합에서 우승을 한 일은 잊혀 지지 않네요. 일본인들에게 눌려있던 온 겨레가 한껏 의기양양해졌던 사건이었거든요.

종로통에 있던 단성사, 우미관 같은 극장에서는 연일 재미난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고 가끔 어른들 눈을 피해 몰래 보러가곤 했어요. 어쩌다 명동 일본인 거리로 나가는 것이 가장 큰 재미였지요. 당시 경성은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었는데, 우리 조선 사람들은 북촌인 종로통에서, 일본인들은 혼마치[本町]라고 불렀던 지금의 명동을 중심으로 노닐었지요. 거기에는 미쓰코시(지금의 신세계)같은 일본 백화점들과 커피숍 등 신기한 것들이 많았어요. 이른바 ‘모던 뽀이’와 ‘모던 껄’들이 거닐던 곳이었지요(TV에서 <경성스캔들> 이라는 드라마를 했었는데 당시 풍경이 잘 소개되어 있더군요). 저 역시 어린 마음에 신여성들이 하는 것처럼 파마머리 모양을 하고 명동거리를 한 번 거닐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지요. 하지만 결코 그렇게 할 수는 없었어요. 이런 것들은 퇴폐와 타락의 징조였고 따라 해서는 안 될 것들이었지요. 당시 교회 어른들은 일본은 곧 망할 나라였고 머지않아 종말이 닥쳐올 것이라고 믿었거든요. 그러니 마지막 때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지키고 믿음에 굳게 서있어야 했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