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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재 종료

모탕의 노래 5 l 롤빵 세 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교실에 빈우 혼자 앉아 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를 향해 빈우는 평소의 단정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벌쭉 하고 웃는다. 눈이 벌겋다. 실내화를 신어야 되는 교실에서 흙투성이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책상 위에 있던 책을 들고 공부를 하는 시늉을 한다. 빈우는 책을 거꾸로 든 채, 시선을 책에 고정시키다가 다시 나를 향해 벌쭉 웃는다.

“성빈우! 교무실로 올라가 있어라.”

빈우를 먼저 교무실로 올려 보내고 화장실을 다녀온 나는 교무실에서 또 하나의 이상한 풍경과 만나게 되었다. 나이 지긋하신 학년 부장 선생님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빈우의 등판을 때리고 계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빈우를 교무실 밖으로 밀어내고 계셨다.

“야! 이 자식아! 실내화를 신고 교무실에 들어와야지. 흙으로 범벅된 신발을 신고 어딜 들어와!”

부장 선생님께 매를 맞으면서도 빈우는 여전히 벌쭉벌쭉 웃고 있었다.

“문 선생님. 이놈 술 취했어요. 아주 많이 취한 것 같습니다. 양호실에 가서 쉬게 하든지 집으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애들이랑 선생님들이 알게 되면 문제가 복잡해질 것 같아 내가 일부러 야단을 쳤습니다.”

환갑을 바라보는 학년 부장 선생님은 내 귀에 대고 조그맣게 말씀을 하셨다. 역시 관록 있는 교사는 달랐다. 나는 전혀 짐작도, 상상도 못한 일, 술 취한 학생의 일을 현명하게 처리해 주신 것이다.

나는 빈우의 귀를 잡고 양호실로 끌고 가서 패대기치듯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학생이 학교에 술을 마시고 오다니, 그것도 아침에…. 빈우보다 내 얼굴이 더 벌겋게 되었다.

“하! 그놈 참 얼굴 귀엽네요. 이런 녀석이 뭐가 괴로워서 술에 취했을까? 문선생님. 그래도 얘는 선생님이 좋은가 보네요. 취해도 학교에 온 걸 보니 선생님께 위로를 받고 싶었나봐요. 오늘 하루 그냥 양호실에서 지내도록 놔두세요. 그리고 이따 오후에 와서 이 아이 마음이나 치료해 주세요. 마음치료는 담임 선생님이 해 줘야 되지 않겠어요?”

양호 선생님. 내 고등학교 시절부터 어머니같이 자애로웠던 양호 선생님께서는 흥분하고 있는 나에게 커피를 한 잔 주시면서 다독거리듯 말씀을 하셨다. 양호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빈우의 술에 취한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 속 상황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 나는 언제나 부장 선생님처럼 무서움 속에 자애로움을, 양호 선생님처럼 내면을 바라보는 힘과 이해심을 갖고 있는 교사가 될 수 있을까?

“점심은 먹었냐?”

“예.”

“북어국이 나왔던데. 해장은 제대로 했겠네?”

“죄송해요. 선생님.”

“차라리 결석을 하지 그랬어. 학교는 왜 왔냐?”

“지금 부모님께서 여행중이세요. 어제 밤에 혼자 집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요. 누구에겐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때 선생님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새벽에 학교까지 걸어왔어요.”

“망우리에서 신설동까지 걸어왔다고? 술이 취한 상태로?”

“예.”

빈우를 그렇게 힘들게 한 것은 한 여학생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에 만나 고3이 된 지금까지 사귀던 여자 친구 민지.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같이 어울리게 된 빈우의 친구 시윤이. 늘 민지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어 시윤이가 민지를 좋아하고 있는 것을 전혀 몰랐던 빈우. 그리고 지난 발렌타인 데이에 민지에게 받은 한 아름의 초콜릿 상자를 보이며 이제는 민지를 자기에게 양보하라고 말했던 시윤이. 자기도 똑같은 선물을 받았지만 시윤이에게 아무 말도 못했던 빈우. 자신만이 민지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다가 배신감을 느낀 빈우. 그리고 곰곰히 자신과 시윤을 비교하다가 모든 면에서 자신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빈우. 이 다음에 이 다음에 혹시 결혼이라도 한다면 시윤이가 훨씬 민지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빈우. 또 민지는 물론이고 시윤이란 친구도 잃기 싫었던 빈우. 결국 자신이 뒤로 물러나고 박수를 쳐 주면 모든 것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시윤이와 민지에게 전화를 하고 밤새 술을 마시면서 울었다.

“난 또 뭐라고. 야! 성빈우 아직 끝난 게임도 아닌데 왜 벌써 쓰러져서 이 난리를 폈냐?”

빈우는 눈이 동그랗게 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민지는 뭐라고 그러더냐?”

“친구끼리 왜 그러냐고 그러고 자기가 무슨 물건이냐고 화를 냈어요.”

“거, 아주 똑똑한 아가씨네. 그러고보니 진짜 빈우 네 놈한테는 아까운 친구다. 근데 말야. 넌 대한민국 최고의 선생, 문경보의 수제자다. 나한테 최고인 네 녀석이 그렇게 한 방에 날아가는 꼴을 내가 가만히 볼 수 없지. 자, 내 이야기를 잘 들어라. 이 싸움에서 네가 이길 수도 있는 방법을 알려줄테니까 말야.”

빈우는 눈을 반짝거리면서 나에게 가까이 다가 앉았다.

“우선 너는 멍청한 놈이란 걸 인정해라. 잘 생각해 봐. 네가 시윤이에게 민지를 양보했다고 해서 둘이 잘되란 보장이 어디 있어? 널 선택하든, 시윤이를 선택하든, 또 둘 다 친구로 지내든, 둘을 모두 뻥 걷어차든 그건 민지가 결정한 일이란 말야. 너는 시윤이에게 이렇게 말을 해야지. 시윤아! 우리 민지에게 선택권을 주자. 다만 우린 학생이고 이 일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니까 좀 더 시간을 두고 기다리자. 그리고 민지에게도 시간을 주고 고민해 달라고 하자. 이렇게 말야.”

“선생님. 그래도 제가 시윤이보다 잘난 게 하나도 없어요.”

“그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본론이야. 나도 알아. 시윤이가 얼마나 좋은 놈인지. 미안하지만 현재 상황으로 보면 내가 민지라도 시윤이를 선택할꺼야. 그건 아주 분명한 현실이고 사실일 수도 있지. 그런데 말이야. 너 교회 다니니까 내 말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어느 날 말야 신이 너와 시윤이의 운명 앞에 버티고 서서 두 사람 이제부터 뒤로 돌아 앞으로 가! 하고 명령을 내리면 그땐 누가 앞에 서 있지?”

빈우의 표정이 멍해졌다.

“누가 앞서 달려가고 있는 지는 아직 아무도 몰라. 너의 가치를 네 스스로 함부로 판단하지마. 또 사람은 저마다 길이 따로 있고, 저마다 주인공인데 괜스레 남과 키를 재고 힘을 겨루는 것은 정말 부질 없는 짓이야. 민지라는 아가씨가 말야. 그런 것도 모르고 겉에 드러난 현재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아가씨라면 말이야, 천하에서 가장 멋진 내 제자 성빈우의 짝꿍으로는 영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성빈우의 마음을 이렇게 사로잡을 정도라면 민지는 그 정도는 충분히 생각하는 꽤 괜찮은 아가씨라고 나는 믿는다. 자. 힘내 다시 한 번 싸워봐. 그리고 그 전에 오늘은 집에 가서 너 자신에게 함부로 대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말야.”

빈우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나기 시작했다.

다음 날 빈우는 두 개의 롤빵을 사와서 학년 부장 선생님과 내 책상 위에 수줍게 내려 놓고 도망치듯이 교무실을 빠져 나갔다. 내 몫의 롤빵을 양호선생님께 드리려고 양호실로 가던 도중 똑같은 롤빵을 들고 교무실로 오시던 양호선생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선생님과 나는 서로의 손에 들려 있는 롤빵을 보고 유쾌하게, 정말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문경보|흔들리며 피는 꽃과 같은 아이들에게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대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그는 늘 아이들과 함께 할 무언가를 꿈꾸며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