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배경음악은 영화를 추억하는 좋은 도구가 된다. 주인공이 거닐던 거리가 어제 본 듯 그려지고, 애절한 이별장면에 녹아나던 음악에는 마음이 먼저 반응하며, 문득 같이 영화를 보았던 오래 전 누군가가 떠올라 소스라치게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괜스레 눈물이 차오른다. 추억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끔 내 삶을 추억할 때도 그런 배경음악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좋은 기억이라면 그 음악과 함께 좀 더 행복하게, 아프고 슬픈 기억이라면 그 음악에 기대어 조금은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도록. 그런 음악을 선물하고 싶다며 다가온 사람이 있다. 때론 감미롭게, 때론 정겹고 따뜻하게 우리 삶에 위로를 건네는 사람,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이루마. 그의 피아노 선율처럼 싱그러운 봄이 성큼 다가온 어느 날, 그를 만났다.
군복을 벗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다
“아~ 제대한 지 얼마 안돼서 아직 어색해요.” 바짝 다가온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연신 쑥스러워하던 그의 말에 스텝들의 웃음이 터진다. 그의 말대로 조금은 어색하고, 살짝 긴장돼있던 분위기가 일순 부드러워진다. 솔직하게 먼저 마음을 보여주는 그의 소탈한 말투는 KBS 1FM <세상의 모든 음악>‘이루마’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라디오 속, 그의 목소리는 조금 더 클래식컬하게 들렸다고나 할까.“ 청취자들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줄 시간이 별로 없어요. 곡 소개를 하고, 전해주기 빠듯해서….‘ 그 남자가 머문 자리’ 코너가 있는데, 그 남자가 저라고 생각하고 그 글을 소개를 해야 해서 들어가기 전에, 진짜 몇 십 번씩 읽고 들어가요. 최대한 제 이야기처럼 들리게 하려고.” DJ를 시작한 지 두 달 남짓, 새로 입은 그 옷은 아직 익숙해지는 중이다.
지난 3년 간, 그의 삶은 이런 새로운 시작과 익숙해짐의 반복이었다. 2006년 7월, 영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해군에 입대한 그는 해군 홍보팀과 군악대에서 근무하다 작년 8월 말 제대를 했다. 군 생활 중 결혼을 했고, 아내와그를 반반씩 닮은 딸 로운이(8개월)도 생겼다. 짧은 시간에 이어진 삶의 다양한 변화들로 그가, 그의 음악이 어떻게 변화했을지 궁금했다.
아빠가 만든 음악이란다
6집 앨범‘ P.N.O.N.I’에는 그 변화 속에 녹아난 그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솔로 때는 우울했어요. 혼자라는 것에 대한 표출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그는 11살 때부터 영국에서 홀로 유학생활을 했다). 음악을 듣고, 제 음악을 듣는 분들을 통해서 오히려 위로를 받고 싶어 했죠.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제가 위로를 해드릴 수 있는 음악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이번 앨범은 그가 병장 때 작곡한 곡이 많다며‘, 군인 음악’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을 쓰고 싶었어요. 제대, 내 앞날에 대한 꿈, 희망, 나의 아기를 볼 수 있다는 것. 이제 계속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기쁨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런 기대하던 기쁨 속에서 그는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가장으로서 해야 될 일도 있고, 곡을 써야하고…. 제가 더 할 일이 많아졌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러면서 저에게는 잠깐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 같아요. 계속 방에 틀어박혀 음악 작업을 하다보면,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있는 순간을 캐치하지 못하고 계속 반복할 때가 많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잠깐씩 음악에서 빠져나와 아기와 같이 놀고, 아내 일도 도우면서 생각의 전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요.” 새로운 만남들은 음악에 대한 그의 태도를 더 자유롭고, 여유 있게 변화시킨 듯하다.“ 예전에는 제가 혼자 듣고 좋으면, 다른 사람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제 음악을 들려줄 사람들이 있어요. 아내와 아이. 나중에 커서 이게 아빠가 만든 음악이야 했을 때“, 정말 좋다”라고 주변에서 얘기해줄 수 있을 만큼의 음악을 써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겨요. 그리고 더 깊이 있는 음악, 범위를 넓혀 피아노 솔로뿐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 클래식한 곡, 노래 작곡도 다양하게 해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겨요.”
연주가 아닌, 창작의 피아니스트
그는 5살 때부터 두 누나의 어깨너머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11살에는 영국으로 음악 유학을 떠났고, 음악 영재의 산실로 알려진 퍼셀 스쿨을 거쳐 한국인 최초로 런던대 킹스컬리지에 입학, 현대음악과 작곡 등을 전공했다. 그의 이력만 보면, 타고 난 영재로 아무 어려움 없이 음악을 했을 것 같지만 그에게도 좌절과 절망의 순간들이 있었다. 음악 학교에서 또래 아이들의
월등한 실력을 접하며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일찍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 피아노가 좋아 음악을 시작했지만, 연주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제 모토가‘ 내 한계를 알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자’예요. 내가 내 한계를 안다는 것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그 만큼 실망을 덜 하게 되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지름길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어떤 곡을 연주하다‘ 나는 이 곡은 연주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음악을 쓰고, 내가 연주를 하자.’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듣는 사람들은 제가 연주를 너무 편하게 한다고, 어떻게 그렇게 잘 하냐고 하죠. 제가 만든 음악이니까! 그렇게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내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었다’라는 생각을 나중에는 깨버리게 됐어요.” 순간순간 찾아오는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를 창작이라는 지루하고 고독한 길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마주하게 해주었다.
음악 속의 하나님, 하나님 속의 음악
12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피아노 솔로 음반을 들고, 혈혈단신으로 새로운 시작을 했던 데뷔 초. 그는 교회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많이 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어서였다. 모태신앙으로 중고등부 때부터 성가대 반주자, 지휘자를 계속하며 교회를 섬겨왔던 그였는데, 일부에서 그의 음악이 뉴에이지 음악으로 규정되어 부정적이고, 왜곡된 시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누구를 생각하며 음악을 듣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당연히 믿지 않는 사람은 (음악을 들으며) 내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하고, 빠지게 되겠죠. 하지만 묵상이라는 것은 당연히 나의 주인을 생각하는 거잖아요. 제가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음악을 썼다면 당연히 듣는 사람도 그런 영향을 받겠죠. 하지만 제가 음악을 쓸 때는, 항상 그 분에 대한 생각이 한편에 자리 잡고 있거든요. 그 음악을 통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닐까요.” 음악에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정신이 담기는 것이기에, 결과를 생각하기 전에 그것을 창작하는 과정 자체도 중요시 여긴다는 그. 예술과 종교가 분리되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예술과 종교가 만나는 그 지점에서 또 그분을 만나게 되리라는 믿음이 그에게는 있다. 나를 지으시고, 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는 이가 나를 통해 하실 일이 있어 주신 재능, 음악.‘ 내 음악은 내가 쓰는 것이 아니구나.’ 늘 고백한다는 그는 듣는 사람들이‘ 신앙인이기에 저런 음악을 쓸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한다면 자신의 몫을 한 거라고 생각한다. 이루마를 통해 하시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하셨다는 믿음으로 그 분의 목소리에 늘 귀 기울인다. 끊임없이, 언제 어디서나 친근하게 대화하며….
그에게는 이루고픈 꿈이 두 가지 있다. 먼저, 최고의 아빠가 되는 것. 딸에게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뜻에서‘ 이로운’ 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 자신도 딸이 살아갈 이 세상을 음악으로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 그리고 또 하나, 숲 속에 작은 음악학교를 세우려고 한다. 어떤 음악이든 쓸 수 있고, 어떤 음악이든 연주할 수 있는 학교. 그는 그 곳에서 정말 음악을 하고 싶은데 여건이 안 되는 아이들, 환경만 제대로 갖춰지면 마음껏 음악성을 발현할 수 있는 아이들을 키워내고 싶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다면 가장 값진 만남이지 않을까. 그게 저와 피아노와의 관계고, 듣는 분들과 저 역시 그런 관계이길 바래요.” 그는 오늘도 피아노를 통한 값진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의 음악이 듣는 이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찾게 되는, 삶의 배경음악이 되길 바라면서.
이루마가 추천하는 책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데이비드 베일즈ㆍ테드 올랜드
군에 있을 때, 아내 손혜임이 선물해준 책. 팬들이 자신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음악적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위로가 되어주었다. 예술 창조과정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즐기며 작업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고 다짐하게 해준 책.
글 정미희 | 사진 탁영한
“아~ 제대한 지 얼마 안돼서 아직 어색해요.” 바짝 다가온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연신 쑥스러워하던 그의 말에 스텝들의 웃음이 터진다. 그의 말대로 조금은 어색하고, 살짝 긴장돼있던 분위기가 일순 부드러워진다. 솔직하게 먼저 마음을 보여주는 그의 소탈한 말투는 KBS 1FM <세상의 모든 음악>‘이루마’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라디오 속, 그의 목소리는 조금 더 클래식컬하게 들렸다고나 할까.“ 청취자들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줄 시간이 별로 없어요. 곡 소개를 하고, 전해주기 빠듯해서….‘ 그 남자가 머문 자리’ 코너가 있는데, 그 남자가 저라고 생각하고 그 글을 소개를 해야 해서 들어가기 전에, 진짜 몇 십 번씩 읽고 들어가요. 최대한 제 이야기처럼 들리게 하려고.” DJ를 시작한 지 두 달 남짓, 새로 입은 그 옷은 아직 익숙해지는 중이다.
지난 3년 간, 그의 삶은 이런 새로운 시작과 익숙해짐의 반복이었다. 2006년 7월, 영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해군에 입대한 그는 해군 홍보팀과 군악대에서 근무하다 작년 8월 말 제대를 했다. 군 생활 중 결혼을 했고, 아내와그를 반반씩 닮은 딸 로운이(8개월)도 생겼다. 짧은 시간에 이어진 삶의 다양한 변화들로 그가, 그의 음악이 어떻게 변화했을지 궁금했다.
아빠가 만든 음악이란다
6집 앨범‘ P.N.O.N.I’에는 그 변화 속에 녹아난 그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솔로 때는 우울했어요. 혼자라는 것에 대한 표출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그는 11살 때부터 영국에서 홀로 유학생활을 했다). 음악을 듣고, 제 음악을 듣는 분들을 통해서 오히려 위로를 받고 싶어 했죠.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제가 위로를 해드릴 수 있는 음악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이번 앨범은 그가 병장 때 작곡한 곡이 많다며‘, 군인 음악’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을 쓰고 싶었어요. 제대, 내 앞날에 대한 꿈, 희망, 나의 아기를 볼 수 있다는 것. 이제 계속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기쁨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런 기대하던 기쁨 속에서 그는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가장으로서 해야 될 일도 있고, 곡을 써야하고…. 제가 더 할 일이 많아졌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러면서 저에게는 잠깐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 같아요. 계속 방에 틀어박혀 음악 작업을 하다보면,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있는 순간을 캐치하지 못하고 계속 반복할 때가 많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잠깐씩 음악에서 빠져나와 아기와 같이 놀고, 아내 일도 도우면서 생각의 전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요.” 새로운 만남들은 음악에 대한 그의 태도를 더 자유롭고, 여유 있게 변화시킨 듯하다.“ 예전에는 제가 혼자 듣고 좋으면, 다른 사람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제 음악을 들려줄 사람들이 있어요. 아내와 아이. 나중에 커서 이게 아빠가 만든 음악이야 했을 때“, 정말 좋다”라고 주변에서 얘기해줄 수 있을 만큼의 음악을 써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겨요. 그리고 더 깊이 있는 음악, 범위를 넓혀 피아노 솔로뿐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 클래식한 곡, 노래 작곡도 다양하게 해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겨요.”
그는 5살 때부터 두 누나의 어깨너머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11살에는 영국으로 음악 유학을 떠났고, 음악 영재의 산실로 알려진 퍼셀 스쿨을 거쳐 한국인 최초로 런던대 킹스컬리지에 입학, 현대음악과 작곡 등을 전공했다. 그의 이력만 보면, 타고 난 영재로 아무 어려움 없이 음악을 했을 것 같지만 그에게도 좌절과 절망의 순간들이 있었다. 음악 학교에서 또래 아이들의
월등한 실력을 접하며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일찍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 피아노가 좋아 음악을 시작했지만, 연주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제 모토가‘ 내 한계를 알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자’예요. 내가 내 한계를 안다는 것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그 만큼 실망을 덜 하게 되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지름길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어떤 곡을 연주하다‘ 나는 이 곡은 연주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음악을 쓰고, 내가 연주를 하자.’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듣는 사람들은 제가 연주를 너무 편하게 한다고, 어떻게 그렇게 잘 하냐고 하죠. 제가 만든 음악이니까! 그렇게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내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었다’라는 생각을 나중에는 깨버리게 됐어요.” 순간순간 찾아오는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를 창작이라는 지루하고 고독한 길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마주하게 해주었다.
음악 속의 하나님, 하나님 속의 음악
12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피아노 솔로 음반을 들고, 혈혈단신으로 새로운 시작을 했던 데뷔 초. 그는 교회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많이 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어서였다. 모태신앙으로 중고등부 때부터 성가대 반주자, 지휘자를 계속하며 교회를 섬겨왔던 그였는데, 일부에서 그의 음악이 뉴에이지 음악으로 규정되어 부정적이고, 왜곡된 시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누구를 생각하며 음악을 듣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당연히 믿지 않는 사람은 (음악을 들으며) 내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하고, 빠지게 되겠죠. 하지만 묵상이라는 것은 당연히 나의 주인을 생각하는 거잖아요. 제가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음악을 썼다면 당연히 듣는 사람도 그런 영향을 받겠죠. 하지만 제가 음악을 쓸 때는, 항상 그 분에 대한 생각이 한편에 자리 잡고 있거든요. 그 음악을 통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닐까요.” 음악에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정신이 담기는 것이기에, 결과를 생각하기 전에 그것을 창작하는 과정 자체도 중요시 여긴다는 그. 예술과 종교가 분리되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예술과 종교가 만나는 그 지점에서 또 그분을 만나게 되리라는 믿음이 그에게는 있다. 나를 지으시고, 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는 이가 나를 통해 하실 일이 있어 주신 재능, 음악.‘ 내 음악은 내가 쓰는 것이 아니구나.’ 늘 고백한다는 그는 듣는 사람들이‘ 신앙인이기에 저런 음악을 쓸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한다면 자신의 몫을 한 거라고 생각한다. 이루마를 통해 하시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하셨다는 믿음으로 그 분의 목소리에 늘 귀 기울인다. 끊임없이, 언제 어디서나 친근하게 대화하며….
그에게는 이루고픈 꿈이 두 가지 있다. 먼저, 최고의 아빠가 되는 것. 딸에게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뜻에서‘ 이로운’ 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 자신도 딸이 살아갈 이 세상을 음악으로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 그리고 또 하나, 숲 속에 작은 음악학교를 세우려고 한다. 어떤 음악이든 쓸 수 있고, 어떤 음악이든 연주할 수 있는 학교. 그는 그 곳에서 정말 음악을 하고 싶은데 여건이 안 되는 아이들, 환경만 제대로 갖춰지면 마음껏 음악성을 발현할 수 있는 아이들을 키워내고 싶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다면 가장 값진 만남이지 않을까. 그게 저와 피아노와의 관계고, 듣는 분들과 저 역시 그런 관계이길 바래요.” 그는 오늘도 피아노를 통한 값진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의 음악이 듣는 이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찾게 되는, 삶의 배경음악이 되길 바라면서.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데이비드 베일즈ㆍ테드 올랜드
군에 있을 때, 아내 손혜임이 선물해준 책. 팬들이 자신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음악적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위로가 되어주었다. 예술 창조과정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즐기며 작업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고 다짐하게 해준 책.
글 정미희 | 사진 탁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