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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과 죽은 시인의 사회



검열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고대 폴리스 국가 시절부터 ‘도덕’이라는 잣대로 문화 예술에 대한 통제를 해왔다. 특히 플라톤은 시(詩)란 광기적 상상력에 의해 현실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을 더럽힐 수 있고 그래서 국가가 통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을 거부하는 시인은 폴리스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문화와 예술에 드리워진 도덕의 잣대
근대 이후엔 그 도덕 기준은 이후 ‘성(性)’에 집중되었다.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성과 권력 사이엔 언제나 배제와 은폐의 관계만이 있다고 말하였다. 한 마디로 부정적인 관계만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권력은 오히려 성에 대한 표현을 간섭함으로써 최종적으로는 사람들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한다는 역설을 노린다. 물론 푸코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과거 군사독재시절 ‘음란’하다는 생뚱맞은 이유로 유독 많은 금지를 당한 우리시대의 불후의 명곡들을 보면, ‘성’에 대한 검열이 권력기관의 통치이념 구현과 연관이 있다는 푸코의 주장은 과장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소통의 능력 = 창조의 정신
최근 인기 그룹인 동방신기의 <미로틱>이라는 노래의 일부가 청소년보호위원회(이하 청보위)로부터 음란하다고 판정을 받고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가 소송을 통해 ‘음란’의 딱지를 뗄 수 있었다. 또 영화계에서는 최근엔 파격적인 섹스장면을 묘사한 <숏버스>가 실질적인 상영금지인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다가 소송을 통해 법원으로부터 비로소 해금조치를 받았다. 법원은 청보위의 판단이 자의적이고 형평성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문화계에서는 현정부의 정치적 보수화 경향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른바 ‘불온서적’파문에서부터 최근 음란물 소송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흐름이 일관성이 있다고 할까. 이에 대한 우려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검열과 제재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음란물을 비롯한 유해매체가 미치는 심각한 악영향을 보아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에 대한 판단과정과 법적조치가 합리적이지 않고 공감할 수 없는 것이라면 문제는 더 크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필히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공동체는 스스로를 검열하게 되는, 이른바 추방당하지 않은 시인들로 채워진 ‘죽은 시인의 사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생명력은 가정과 교회, 사회를 막론하고 얼마나 잘 소통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결국 소통의 능력이 중요하다. 소통의 공간은 생명이 소통하는 공간이 되고 결국 창조의 정신이 소통하는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MB 정부가 그토록 강조하는 ‘경쟁력’이란 것도 결국 이 소통에서 나오는 창조정신의 힘이다. 이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백광훈|초록과 희망으로 충만한 봄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한 사람, 우리 모두가 복음의 정신으로 소통하기를 꿈꾸는 목사, 문화선교연구원의 책임연구원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