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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편집장의 편지

고단한 삶, 희망의 인문학 ㅣ 편집장의 글

가슴에 적힌 글로 살다

그러고 보니 딱 6년 전, 이맘 때였다. 오월의 햇살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눈부시게 무거웠고, 유월의 초록이 펼치는 싱그러움은 외려 갈수록 나를 바싹바싹 타들어가게 했다. 우연찮게 보게 된 영화 하나로 시작된 이 무시무시한 홍역. 단방에 존재를 해체당한 나는, 수면 위로 회오리를 일으키며 올라오는, 미처 몰랐던 '나'를 마주하느라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고통의 시작인 것을 똑똑히 예감하면서도,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연이어 책을 읽어대고, 먼 거리를 오가며 뜬금없는 철학 강의를 끝끝내 듣고야 말았다. 그렇게 서른이라는 나이를 목전에 두고 갑자기 찾아온 '공부'의 과목은 '인문학'이었다. 이미 보고 듣고 알아왔던 같은 지식이었으나, 다른 메시지를 뿜어내며 그동안 내 살에 박혀 있던 체질과 틀을 완전히 뒤바꾸는 업적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를 사랑하는 일'이었고, '나로 살아가는 일'이었다. 잠자던 나를 깨운 것이 신앙도, 교회도 아닌, 영화와 책이라니. 인내와 순응을 무기로 했던 그 신앙은 오히려, 진작 깼어야 하는 나의 틀을 더 견고케 하는 주문과도 같았다니. 소스라치게 놀랄 대목이었다. 그 때 나는, 칸트의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너는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의 명제에 힘겨웠고, 존재와 소유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강의를 들으며 내내 나에게 질문했다. 지금 나는 '무엇'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여기는가. '무엇'이 아닌, '있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있음'자체가 거부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걸 인정하느니, 차라리 '무엇'의 결핍으로 불행을 결론짓는, 나를 원래 그런 인간으로 치부해 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묻고 또 물었다. 희미하게나마 저 멀리 답이 보였지만, 차마 답을 향해 돌아가기에 이미 너무 많이 와 버린 것 같아, 그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거기서 삶의 멀미를 견디는 일뿐이었다. 죄책감과 환희가 양 날개를 달고 동시에 밀려왔고, 퇴적된 아픔이 자꾸만 통증을 일으켰지만, 시간이 갈수록 잃어버렸던 '나'는 마구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물결 위로 끊임없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파문의 흔들림은 아름답지만, 영원히 흔들릴 수는 없는 일. 언젠가는 잔잔히 고요해져야 하는 숙명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과 다른 나는 다시 똑같은 '일상'을, '다르게' 살아야 했다. 흔들림의 어지러움으로 충만한 것은 이제 견딜 만한데,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 말해야 하는 그 거대한 일상은, 공포였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흐트러져버린 나를 '새로 고침'을 누르듯 일상을 재설정하도록 도왔던 것은, 신학과 신앙이었다. 어떤 목사님의 말처럼 나의 신학과 신앙이 다시 세례를 받은 것 같았다. 존재의 본원인 그분과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황홀한 만남은 나를 다시 살게 했다. 뒤늦은 회심이라고 해야 할까. 때로는 앎과 깨달음이 삶의 질곡을 몇 만 번 더 접었다 펴게 한다. 차라리 모르고 지나갔다면 겪지 않아도 되는 고통과 구토를 일으킨다. 그럼에도 나는, 침묵과 외면의 깊은 바다 속에 숨어 있던 나를 찾아 흔들어 본연의 존재로 살아가게 한 버지니아 울프, 에리히 프롬, 마틴 부버, 울리히 벡, 앤소니 기든스, 질송 등의 깊고 아름다운 지혜에 진하게 입 맞추고 싶다. 지금도 이를 추억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다. 그때 쓴 글을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기 시작하니까. 하지만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했던 그 '공부'는 마법처럼 나의 '존재'에 지워지지 않을 수를 새겨 놓았다. 삶과 만나지 않는 공부는, 그저 문자일 뿐이다. 내 것으로, 내 가슴으로 들어와야 적어 놓을 수 있다. 기쁨의 50일이 이어지고 있다. 죽음을 이긴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야 하는 시간. 죽는 듯 고통스러운 '앎'의 파문이 있다면 기꺼이삶을 던져라. 그리고 그대의 가슴에 적힌 글로, 다시 살아라.

편집장 노영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