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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09 05-06 고달픈 삶, 희망의 인문학

고단한 삶, 희망의 인문학 3ㅣ 진정한 공부는 희열, 나눔, 그리고 자.유.


연구공간 수유+너머 고미숙 연구원

약 10여 년 전, 수유리에 작은 공부방 하나를 열어 세미나를 열고, 강좌를 만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람들이 모이고, 함께 부대끼고 살아가면서 지식과 일상이 만나는 기묘한 실험이 진행되었다. 지식은 단지 머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었고, 가슴 뛰는 앎의 여정에 기꺼이 뛰어 들게 하는 역동이었으며, 그것이 일상과 일으키는 마찰의 에너지는 지금까지의 삶을 새롭게 전환하도록, 길을 열고 빛을 비춰주었다. 지금까지 그 과정을 꼭꼭 밟아 온 ‘수유+너머’, 그 창조의 중심에 고미숙 연구원이 있다. 사재를 털어 연구공간을 만들었지만 그는 이곳의 대표성 직함도 없고, 어떤 월급도 받지 않는다. 오히려 꼬박꼬박 몇 십 만원의 회비를 내고, 후배들이 공부할 자리와 살아갈 삶의 지형을 일구기에 바쁘다.


지식과 일상이 포개져 축제를 만들어내는 곳
<열하일기>라는 고전을 ‘지금, 여기’로 이끌어내 그 밑바닥 깊은 곳의 지혜를 한바탕 수다로 풀어낸 이후 고전평론가라 불리는 그는 수유+너머를 상징하는 ‘선생님’이다.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들과의 접속을 통해 경계를 넘나드는 지식의 횡단이 미지의 세계를 열어가는 동력임을 경험하며,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지식의 생산’이라는 수유+너머의 토대를 형성해갔다. 수유+너머는 여러 인문학 강좌와 세미나, 토론등이 테마별, 세대별, 시대별로 열리고 있다. 전문연구자들부터 시작해 예비 박사들, 석사과정에 학부졸업생, 직장인에서 전업주부까지 저마다 다른 구성원들이 모여 다양한 학문의 조우가 폭넓게 이루어진다. “모든 강좌가 늘 학생들로 넘쳐나진 않았어요. 하지만 실패는 또 다른 가능성이잖아요. 강의를 세미나처럼 변형시켜 활발한 토론과 나눔으로 진행해보니, 더 좋더라구요. 중요한 것은 수치가 아니라 활동 내용이구나, 깨달았죠.” 강의의 가장 큰 조건은 가르치는 이가 그 내용에 매혹되어야 한다는 것. 스스로 그 앎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이가 무엇을 가르칠 수 있냐는 거다. 그래서인지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의 경계가 모호할 만큼 모두가 같은 열정의 바퀴를 타고 즐긴다. 학생으로 들어와 수강하다가 공부하여 강사가 되기도 하고, 가르치기만 했던 강사가 다른 강좌의 학생이 되기도 하는, 그것이 낯설지도, 어색하지도 않는 이곳은 바깥 세상의 당연한 논리가 영 들어맞질 않는다.
강좌와 배움이 있는 지식공동체에서, 일상을 공유하고 삶을축제로 바꾸는 생활공동체로, 이제는 더 나아가 존재의 본원적 질문을 던지고 더욱 인간답게 살아가고픈 영성공동체로, 수유+너머는 그렇게 진화한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근저에는 ‘인문학’이라는 심연의 바다가 있음을 놓치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공부란 몸과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것
인문학 공부 열풍이 부는 요즘, 여기저기에서 강좌를 맡아 소통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넓고 깊어진 그는 이 흐름이 반갑지 않을까. “돈을 잘 버는 것이 행복이나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깨달음은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걸 근거로 또 인문학 공부를 ‘소비’하고 ‘상업화’하려는 움직임이 느껴져 씁쓸해요. 이것으로 또 자본을 증식하려는 건 아닌지….” 이 위기를 그저 모면하려는 궁여지책으로는 절대로 인문학적 장이 열리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렇다면 그 장 안으로 들어 가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현대인들의 중요한 문제는 몸과 마음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데 있어요. 거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죠. 책을 백 날 읽어도 그것이 내 행위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헛것이죠.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 성찰은 공부가 아니에요.” 인문학 공부 열풍이 달갑지 않다며 시작하더니, 인문학과는 통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몸’, ‘행위’, 그리고 ‘실천’ 을 이야기한다. “인문학적 성찰은 이러한 몸과 괴리된 성찰을 나의 삶으로 끌어 들이는 일입니다. 개념의 인식과 신체적 수고가 같이 가야 해요.”


그렇다면 ‘인문학이 희망이다’라는 말에는 동의할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역시, 그냥 넘어가질 않는다. “우리가 어디서 넘어졌는지를 알아야 해요. 넘어진 지점을 알지 못한 채 하는 공부는 오히려 위험하죠. 그저 감상적인 위안과 배설일 수 있어요.” 자신의 욕망의 지도를 정확히 보고, 내 삶의 지평에서 스스로 책임 있게 응답해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야 한단다. 인문학적 성찰이 이루어져야 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라는 것. 도시의 중산층이라면 모두 집을 사고, 차를 사고, 부동산에 투자하고, 사교육을 하고 있는 획일화된 삶 속에서 진정 행복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신기루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거다. 그 과정이 생략된 공부는 결코 삶을 바꿀 수 없다. “질문을 던져 보죠. 내 것이 아닌 공부가 과연 희망일까요? 어떻게든 희망을 얻으려고 하는 그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희망이 생깁니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다
“저는 인문학 강의를 하면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습니다. 위로나 치유를 주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는거죠. 문제를 직면하지 않는 공부는 병은 고치지 않고 진통제만 투여 받는 거나 다름없어요. 지금까지 반복되었던 불완전 연소의 소비적 삶에서 벗어나 삶의 배치를 바꾸고 새로운 질서를 구현하는 것이 제 강의가 말하고 있는 거죠.” 고단한 삶에서 그나마 위안과 희망을 보고자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그의 강의는 종종 이렇게 통한다. ‘상처에 왕소금 뿌리기!’ “ 수강생들이 뭘 원하는지, 소위 어떤 게 먹히는 지도 알
아요. 하지만 그 불완전연소의 삶이 반복되고 또 같은 지점에서 넘어지고 말거에요. 존재를 투여하고 마음을 실어서 공부해야 합니다. 마음이 딴 데 가 있는데, 뭐 하러 합니까. 그건 거짓 희망이고, 거짓 위안이죠. 기도도, 봉사도, 헌금도 마찬가지에요. 나의 욕망을 바라고 하는 건 ‘교환’이지 봉사가 아니거든요.” 구체적 일상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무엇을 할수 있을까. “도서관이나 서점보다 백화점을 많이 가고, 책보다 홈쇼핑을 많이 보는 요즘 시대에, 소박하게 먹고 매일 책읽기를 하면 좋겠어요. 나의 자유를 위해 돈 쓰는 회로를 바꿔보라고 하고 싶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좋은, 순전히 스스로 좋아 생긴 내적
욕구에 의해 움직여왔던 수유+너머는 이제 우주와 소통하고 능동적 주체로 살아가며 ‘순환’의 비율을 높여가는 삶을 보여준다. 줄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고, 더 이상 받을 게 없을 만큼 풍족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잉여가 아닌 증여의 삶, 소유가 아닌 나눔의 삶을 자연스레 살게 된다는 이치. “아무리 가난해도 우주에 참여하지 않는 존재는 없어요. 살아있음 그 자체가 환희죠. 나 까짓 게 아무렇게나 살아도 뭐가 문제냐? 그렇지 않아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사람은 이 땅에 없습니다.” 꽤나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그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유머러스한 여유와 어떤 것에도 매이지않는 가벼움이 스치듯 흐른다. 돌아보니 그건, 아마도, ‘자유’ 였던 것 같다. 글ㆍ사진
노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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