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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재영성원 ㅣ 아직도 가야할 길

에디터 노영신  



아가면서 자연 속에서 홀로 조용히 기도하고 묵상하며,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가 있다. 생각해보면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고요한 그 시간을 통해 빛나는 계시와 진정한 쉼을 얻어 왔다. 일상에 지쳐 갈 때, 일 년에 한두 번쯤은 꼭 떠나야 했고 그 떠남이 일상을 더욱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 한다는 나만의 진리를 이제는 몸이 먼저 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시간을 마련했다 하더라도 마땅한 공간을 찾기란 어려운 것이 사실. 이 땅에 대형 금식 기도원은 흔하나, 아늑하고 한적한 기도의 공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일까. 이미 오래전부터 조용히 영성을 말하고, 살고, 나눠왔던 가락재영성원의 존재는 반갑기 그지없다. 가평 설곡면 산자락에 자리한 가락재영성원의 정광일 목사를 만나 그 느린 영성의 길을 잠시 동행해보았다.


떠남에서 시작한 영성의 여정

가락재영성원은 정광일 목사의 철학과 신학과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이다. 남들이 보통 밟는 과정을 따라 예측 가능한 길을 가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 했던 그의 고집 덕분이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석사과정을 밟고, 목사가 된 후, 유학을 가거나, 담임목사가 되는 뭐 그런 수순 말이다. “남들 다 가는 길이, 제가 가야할 길로 여겨지지 않았어요. 유학을 가서 교수가 되기도, 목회를 잘해서 담임목사가 되기에도 스스로 모자랐죠.” 그에게는 정형화된 교회나 학교보다는, 가나안농군학교에서의 자연과의 만남과 실천, 예수원에서의 조용한 피정 등이 몸에 잘 맞는 옷으로 여겨졌다.

“목회를 바쁘게 하면서, 점점 내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도저히 주어지지 않았어요. 무언가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없는 구조 속에 갇혀 있더군요. 한국에서의 삶은 나를 그저 빨리빨리 돌아가게 만들었고, 그 틀에 있다가는 나를 잃어버릴 것 같았어요.” 그래서였다. 자신을 정리할 시간을 위해 자유로운 분위기를 찾아 한국이라는 공간을 과감히 떠나기로 한 건. 교수를 하려면 독일로 갔어야 했고, 목회를 하려면 미국으로 가서 배웠어야 했지만, 떠날 곳조차, 신학하기에는 엉뚱한 나라를 찜했다. “제3의 길로 가고 싶었기에, 프랑스를 택했죠. 그냥 정서적으로 나에게 맞는 곳이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도 역시 아무 기약 없는 가평 시골로 들어와 앉아버렸다. “자연에서 살고픈 욕구가 나의 내면에 진하게 흘렀어요. 제 취향인 거죠.” 몸과 마음이 쉬고 싶었을 때, 마땅히 갈 곳 없었던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며, 하나님과 만나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공간을 그리며, 그렇게 처음 가락재영성원을 시작하게 되었다.



‘가락재다움’의 영성, 쉼. 숨. 섬.

가락재영성원은 자신의 영적 성장과 내면의 성숙을 위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이다. 정광일 목사는 이곳이 특별히 목회자와 신학생들에게 진정한 영성 리트릿을 위한 곳으로 사용되길 바란단다. 수련회와 엠티 위주의 장소로만 제공되는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영성을 깊이 돌아보고 참된 쉼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마치 숙성되어 제대로 된 장맛처럼, 오랜 시간 뿌리 내린 가락재의 역사와 함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영성을 맛보면 좋겠다.

그는 이런 ‘가락재다움’의 맛으로 ‘쉼. 숨. 섬’의 영성을 추구한다. “쉼은 안식이에요. 이 땅에서 쉬어본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쉼을 경험할 수 있어요. 돌림빵(?) 맞듯, 끊임없이 쳇바퀴 돌아가듯 살아가는 일상에서는 쉼을 누릴 수가 없죠.” 한때 “왜 이렇게 나를 돌리는 거야?!” 외치던 그가 이제 돌림빵 맞고 쉼이 필요한 이들에게 멈춤과 느림을 나누고 있는 것. “진정한 쉼을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가 있어야 해요. 톱니바퀴에서 나오면 큰일 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죠. 그 일탈이 거리를 만듭니다.” ‘분리’와 ‘괴리’가 아닌 일정한 ‘거리’! 가락재영성원이 도시와, 제도권 교회와 떨어져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 또한 ‘가락재다움’ 이다. 이 거리를 통해 세상을 더욱 제대로 바라보고, 더 치열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한다고. “한국의 근대화가 그랬듯, 우리는 멈추면 쓰러질까봐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폐달을 밟아왔죠. 쉼을 모르고 달려온 건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물론 그래서 부흥도 했지만, 이제는 쉴 줄 알아야 합니다. 잠시 쓰러져도 괜찮아요. 다시 일어나면 되고, 달리다 힘들면 걸어가면 되잖아요.”

가락재의 두 번째 영성은 ‘숨’이다. “숨은 영적인 호흡, 하나님과의 대화에요. 날숨과 들숨을 통해 살아있음을 깨닫고 숨을 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함께 소통할 수 있게 되죠.” 이렇게 쉼과 숨의 영성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홀로 설 수 있게 된다. 가락재다움은 이 ‘섬’의 영성에서 완성된다. “그 어느 것에도 휘둘리지 않고 내적으로 충만해져 통합의 경지에 이르는 상태입니다. 홀로 설 줄 아는 사람이 더불어 살아갈 줄 알아요.” 조정래 님의 ‘삶’이라는 시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누구나 홀로 선 나무. 그러나 서로가 뻗친 가지가 어깨동무 되어 숲을 이루어가는 것.’


영성이란, 예수의 길을 걷는 현재진행형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기득권을 버린다는 뜻이에요. 거친 음식을 먹는 것,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죠.” 종교가 주류가 되기 시작할 때 그 종교는 변질되기 쉽다. 개신교 수도공동체를 지향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성이 트렌드가 되고 대중화가 되었다는 것은 참 슬픈 현실이란다. “요즘에는 목적이 괜찮으면 수단과 방법은 상관없이 가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나는 길이요’ 말씀하신 예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를 향해 갈 때에도 예수의 방법, 예수의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락재영성수련원’이라고 하지 않고, 가락재영성원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다. 영성은 수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 “영성이라는 말 자체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봐요. 영성은 우리가 취해야 할 어떤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저, 지금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 영성이고, 그 길을 갈 때 어떤 방법으로 가느냐를 고민하는 것 또한 영성이죠.” 그에게 있어 영성은 현재진행형이며 과정이다.

1990년에 문을 열었다는 역사에 깜짝 놀라면서도 동시에 의아해졌다. 그리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까닭에서다. “프로그램 만들고, 홍보했다면 알려졌겠죠. 하지만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초지를 잃지 않고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효과나 결과가 바로 나타나는 일이 아니기에, 긴 호흡으로 천천히 기다렸다. “쌀은 마트에서 손쉽게 사먹을 수 있는 거지만, 그 쌀을 위해 농부는 1년을 기다려요. 나는 사먹는 사람이 아닌 농부가 되는 길을 택한 거예요.” 스스로 원해서 찾았던 길이었기에, 당대에 꼭 어떤 결과물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단다. 자신은 그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라고. “그러나 할 수 있는 건, 해야 합니다.” 힘주어 하는 마지막 한 마디가 참 뜨끔하다. 할 수 있는 것조차 손 떼고 있는 우리의 게으름을 일깨우는 그는 이미 무언가를 이루어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교회가 건물이 아니듯, 가락재영성원은 공간이 아니다. 정광일 목사이고, 그가 걸어온 삶이고, 그의 영성의 여정, 그 자체다. 20여 년간, 이곳을 지켜온 가락재영성원의 묵묵한 존재가 깊은 뿌리를 내려 이제 영성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을 저 땅 깊은 곳에서부터 만나줄 차례가 되었다.




인·터·뷰

몸으로 사는 것만큼만 이야기하라

가락재영성원 정광일 목사


그는 한 시대를 앞서 고민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돈키호테처럼 걸어온 것도 아니란다. “내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고민했을 뿐이에요. 그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죠. 그리고 내 고민은 내가 풀어야 했어요. 그걸 누구에게 맡기고, 무엇에 기대겠어요.” 어느 시점에는 먼저 고민한 사람으로서 시대의 현실적인 요청에 응답해야 하는 순간이 오는 것 같단다. “이제 저는 그런 요청과 질문에 응답하고 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가락재영성원이 그 해답을 완성해가는 중이죠. 어떤 질문이 오더라도 당당할 수 있구요.” 이건, 삶으로 고민하고 몸으로 살아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영성은 신학이 아닙니다. 삶이죠. 저는 몸으로 사는 것만큼만 이야기하려고 해요. 그것이 성육신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적인 것과 복음은 만날 수 있고, 또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수입된 복음이 아닌, 우리 몸으로 소화한 신학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골에 들어와 먹고 사는 것이 어려워 흔들린 적은 없었을까. “삶에서 100%의 만족은 없어요. 결핍은 늘 존재하게 마련이죠. 그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얼마나 결단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보다 결단의 농도가 진한 것은 아니란다. 결단을 좀 더 자주, 많이 했어야 하는 환경에 있었을 뿐이라고. 어쩔 땐 하루에도 몇 번씩 결단을 하게 된다. 지금도 매월 안정적인 재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돌아보면 다 먹고 살았으니, 은혜다. “단 한 번의 결단으로 모든 것이 끝까지 보장되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비신앙적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편안하게 결단 없이 살아도 되는 삶에 어떤 영성적 깨달음이 있을 수 있겠어요?” 결단의 연속이었던 인생을 살아왔으면서도 이만하면 되겠다, 싶은 게 아직 없다. 마치 ‘가락재영성원은 이렇다’라고 말하지 않고,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술어로 끝내는 것처럼. “떼제의 침묵영성과 라브리의 대화영성이 함께 공존하는 곳으로 성숙해졌으면 좋겠어요. 그 때 가락재다운 맛을 내는 영성의 장이 되어 가겠죠.”

그는 아직도 꿈을 꾼다. 오래 전 꿈을 이루어 가고 있다는 그는, 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사랑스러울 뿐이다. 그에게 어쩌면 ‘삶’이란, 결론이 분명한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의 꿈을 꾸고, ‘지금 여기’를 경축하며 감격하는 느낌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