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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재 종료

노무현을 생각하다 1


‘노무현’이라는 시대의 아픔을 떠나보내며, 많은 이들이 먹먹한 가슴으로 할 말을 잃었다고 했다. 어떠한 언어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캄캄하기만 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도 있었고, 생각을 정리할 수 없어 펜을 놓은 이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 그런’ 우리의 마음이 있다. <오늘>을 통해 만나왔던 사람들의 조금씩은 다른, 그러나 조금씩은 같은 마음. 같은 시대를 산다는 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이 마음의 갖가지 결을 들여다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여유가, 이제는 있었으면 좋겠다. 너와 나의 입장과 견해가 다르더라도, 귀를 기울이고 들어볼 줄 아는 넉넉한 마음과 함께 성찰해보려는 움직임이 더욱 소중한 지금이다. <편집자주>


참 이웃, 시대의 고통에 함께 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충격이었고, 큰 슬픔으로 몰려왔다.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였던 사람조차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커다란 아픔이다. 게다가,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이를 바라보는 기독교인들의 생각은 훨씬 더 혼란스럽다. 기독교 전통에서 자살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다른 사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죄로 여겨지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세상에서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인데, 자살은 결국 그러한 명령에 불복종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특히나 유명인이 자살을 하는 경우, 이른바 ‘베르테르 효과’가 나타나서 많은 이들이 모방 자살을 하는 일도 발생하기 때문에 더욱 우려하게 된다. 지난번에 유명 연예인들이 자살하였을 때, 같은 방법으로 자살을 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번 노 전대통령의 자살 이후에도 이를 따라 자살한 사례가 있었다. 교계 일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두고 ‘무책임하다’고 말한 것이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것은 일면 일리 있는 지적이다.

자살에 대한 바른 이해
그러나 자살이라고 하는 행위를 순전히 자살을 행한 개인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을까? 최근 우리 사회의 자살률이 10년째 OECD 가입국 중 최고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자살을 단순히 개인의 책임으로만 볼 수 없게 하는 근거가 된다. 정신의학에서는 자살의 원인으로 흔히 우울증을 얘기하지만, 최근에 왜 우리 사회에서 우울증 환자가 급증해서 자살률이 높아지게 되었는지는 개인의 차원에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자살에 대한 책임의 일부, 아니 어쩌면 상당 부분은 사회에 있다. 자살은 한 개인이 극도의 절망감에 쌓여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극단적으로 선택하는 행위이다. 한 사회의 구성원이 사회 안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그 사회가 올바른 규범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높은 자살률은 우리 사회 규범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인들의 경우, 흔히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지만, 기독교 전통에서 이러한 말이 생기게 된 것은 자살한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자살에 이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논리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조차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말을 근거로 자살한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중 누구도 다른 사람을 정죄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이보다는 기독교의 관점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러한 현실에서 기독교인들이 가져야할 상식적이고 올바른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아픔을 겪지 않도록 사회의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참 시민으로서의 기독교인
우리는 기독 시민의 관점에서 이 시대의 아픔을 바라보아야 한다. 시민은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실천할 수 있는 특성(시민성)을 지닌 사람이다. 이런 시민의 모델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이다.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시민은 결코 약자나 사회 소수자를 무시하지 않고 그들을 배려하고 섬기는 사람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업적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하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하는 등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평생을 우리 사회의 약자를 위해 살고자 했던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노 전대통령이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추구하였던 정치적 이상은 성경의 정신과도 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아와 과부’로 표현되는 사회의 약자를 돌아볼 것을 명하고,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참 이웃, 참 시민으로 살아가야 할 기독 시민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제 자신의 입장에 따라 편을 가르기보다는 한 시대를 사는 이들과 함께 고민하며,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이 시대의 아픔을 바라보아야 한다. 또한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구조적 조건을 개선하고 어느 누구도 소외됨이 없이 존중받으며 사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하고 토론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윽박지르기보다는 합리적인 이성으로 대화하며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 곳곳에서 일방적인 주의와 주장이 난무하는 이때에,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며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묵묵히 실천하는 진지한 기독 시민의 자세가 더욱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정재영|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학위를 받은 국내 토종 박사이고, 현재는 평신도 사회학자로서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종교사회학을 강의하고있다. 그는 여기저기서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기독교 시민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니고 있다.



다하지 못한 이야기

크게 보면,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뉜다.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과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 에리히 프롬의 용어로 하면, 소유양식에 따라 사는 사람과 존재양식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네 삶은 후자가 더 옳은 줄 알면서도, 그렇게 사는 사람을‘ 바보’라 매도한다. 똑똑한 사람은 항상 자기에게 좋은 것을 택하지, 결코 옳은 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바보 노무현의 죽음은 오늘 우리에게 과연 어떤 삶이 옳은가를 묻고 또 묻는다. 자기 안의 절대 순수를 오염시키지 않으려고 묵묵히 십자가를 진 예수가 우리에게 물었던 것처럼, 현실정치에서 그토록 무능하다고 손가락질 받은 노무현도 죽음을 통해 우리를 일깨운다. 성공이니 번영이니 하는 거짓 우상에 홀려 이상과 가치를 저버린 삶이란 얼마나 황망한 것인가를.                                   구미정(숭실대 기독교학과 겸임교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너무 놀라서 믿어지지가 않았고 순간적으로 그런 모습을 지켜볼 이 땅의 청소년들이 어디에 희망을 두어야 할지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관점으로 보면 자살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는 파괴적인 일입니다. 많은 정황이 그 정당화 될 수 없는 한 사람의 자살에 대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이 시대의 얽힌 정치적인 반목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셨는지, 그리고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신앙과 양심의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바른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답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김승태(예영커뮤니케이션 대표, 거룩한빛광성교회 장로)


이런 무게의 죽음 앞에서조차‘ 자살하면 지옥가느냐 마느냐’를 논하고 있는 사람들과 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이 더더욱 부끄러운 날입니다. 봉하마을을 다녀오며, 한 장의 사진이 내내 제 마음을 떠나질 않았습니다. 저 사진 속의 젊은 노무현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요. 단순히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강력한 폭력의 해체를, 혹은 그 배후에 있는 거대한 독재 정권의 몰락을, 아니면 그 너머의 새로운 세상, 약한 자도 없는 자도 다 함께 행복한 세상을 보고 있는 걸까요. 그 시절의 그는 이런 끝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그 역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달리고 믿음을 지켰지만, 끝끝내 완주를 포기했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 먹먹한 나날들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되뇌어 보노라면, 어느 노래 가사처럼 당신의 이름을 아껴 불러봅니다. 
                                  민호기(목사, 소망의 바다, 대신대학교 교회실용음악과 교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을 접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좀 더 진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인생에 있어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도 던지고 있습니다. 쉬지 않고 앞으로만 향해 달려가던 저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씀처럼 세상을 원망하기보다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며 보듬고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안타까움이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담당하는 길만이 그 안타까움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요? 오늘도 많은 일들을 컴퓨터와 마음에 담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올해까지만, 올해까지만 하면서 벌써 몇 년째 이러고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제는 멈춰서 뒤를 돌아봐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박한철(덕성여자고등학교 교사)


서거가 있은 지 며칠 동안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수업 시간 끝내고 기도하면서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조금만 더 슬퍼하고 조금만 더 아파하는 마음을 주세요.’ 슬픈 일에 대해서는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슬픈 동기에 대해서 두 눈 부릅뜨고 서로 입장을 채근하기 전에 시대가 슬프고 정치가 슬프고 교계가 슬픈데, 흐르는 눈물과 슬픔을 삭이며 안타까운 시간을 조금 더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말하는 사랑, 화해가, 평화가 의미 있게 메아리치지 않을 까 생각해 봅니다. 
                                                           배요한(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철학 교수)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아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며 매일 눈물을 흘렸다. 나는 울지 않았다. 어느 날 밤 분향소에서 서서 묵념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열이 터져 나왔다. 그날 나는 내가 인간 노무현을 그렇게도 사랑했음을 새삼 깨달았다. 우리는 영웅 노무현을 인정하지 않았고, 평범하고 수수한 노무현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제 내게 중요한 것은‘ 바보 노무현’이 가르친 삶을 실천하는 일이다.         송태현(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


이제 우린 다시 노무현과 같은 인간적인 대통령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미소가 그립고, 그의 사투리가 그립습니다. 뜨거운 당신의 심장과 눈물을 사랑했으며, 서민들에게 고개 숙일 줄 아는 겸손한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동안 잠시나마 당신을 미워하고 원망해서 죄송합니다. 어쩌면 그 미움과 원망이 아마도 제겐 애증이었으리라 싶습니다. 당신이 가시고 난 후 제 마음이 이처럼 쓰리고 아픈걸 보면요. 그러나 나는 당신이 선택한 방법을 따르지는 않을 겁니다. 아주 아주 냉정하게 타오를 겁니다. 죽을 만큼 힘들어도, 살아남을 겁니다. 이 세상을 원망하며 포기하기보다 살아서, 살아서 꿈틀거릴 겁니다. 시대의 희망이 사라진 지금, 나는 통곡하는 심정으로 당신의 가시는 길을 배웅합니다. 편한 세상에서 편히 지내시길…. 당신의 선택이 이 나라를 일깨우는 힘이 될 것을 믿습니다.  
                                                                                  신미식(사진작가)


예수님은 철저한 아웃사이더였지요. 스스로를 제도권 밖으로 나가셔서 제도권 속을
질타하시고 변화시키셨습니다. 자발적 추방인입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런 이를 지식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경계 속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경계 밖으로 자신을 내몰아 자각하여 새롭게 되기를 원하는 자, 그런 이방인의 삶을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그러나 그렇게 문명의 안온함을 뒤로 하고 거친 광야로 나가기를 즐겨하는 자, 우리는 그런 이들 때문에 진보합니다. 노무현은 그런 이들 중 하나였습니다.                                 승효상(건축가)


2008년 8월, 90세 생일을 맞은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는‘ 민주주의는 타인에 대한 배
려’임을 강조하며, 타인에 대한 일상의 구체적인 언행뿐만 아니라 법과 제도조차도 타인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 새롭게 와 닿는 현 시국입니다‘. 과연 이 정부는 우리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며 배려하고 있는가? 국민들의 안타까움과 간절함, 절박함, 그리고 고통에 대해 충분히 배려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더욱 절실하게 가슴깊이 사무치는 상황입니다.                                      양세진(기독교윤리실천운동 사무총장)


그의 죽음을 섣부르게 미화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때늦은 호들갑 아닌가? 그
의 죽음을 대놓고 폄하하는 것도 슬프다, 그 인생의 무게가 그래도 좋을 만큼 가볍지는 않기 때문이다. 도피였을까, 체념이었을까, 아니면 항의였을까? 나는 어쩌다보니 죽음 그 자체보다, 그의 죽음이 환기시킨 여러 생각들이 버거웠던 듯하다. 불현듯 그가 던지고 간‘ 화두’ 때문에 남겨진 사람들은 한꺼번에 밀린 숙제를 하게 되었다.명, 죽음, 민주주의, 신앙, 그리고 사람. 질문은 짧은데, 대답은 한 없이 길기만 하다. 
                                                                        
양희송(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제게 참으로 헛헛한 마음을 들게 하였습니다. 비보에 한 동안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가슴에 큰 돌덩이 하나 있는 양 절절히 저려왔습니다. 또 말할 수 없는 분노감에 힘들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돌 맞을 각오하고 한마디 한다면, 나는 그가 내린 결정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단지 죽음만으로 그 본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으며 죽음은 반드시 생명과 잇대어 생각해야 하는 숭고한 인간의 마지막 생명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살은 다른 것입니다. 자살은 일종의‘ 심리적 화려함에 기초한 자아구조의 적극적 표현’입니다. 모든 자살을 이렇게 규정할 수는 없으나 정신분석적으로 자살은 현실에 대항하고자 하는 자아의 적극적 표현 수단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누리는 것, 자족(Self-reliance)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하는 것을 소명으로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족은 자신이 어떤 존재일지라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여기는, 자기 존재에 대한 인정과 수용을 말하는 것입니다(빌 4:11-12). 자살은 자족하지 않으려는 인간 욕구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고 노 전 대통령의 선택에 동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비통한 죽음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그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이상억(장로회신학대학교 상담학 교수)


님은 대단하십니다. 노력하여 성공하셨습니다. 원수 사랑을 실천하고자 우방국보다는 적국인 북한을 설득하셨습니다. 전쟁보다는 화해와 평화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는 죽지 않을 수 있었으나 스스로 죽음을 택하셨고 노무현도 죽지 않을 수 있었으나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비겁하게 사는 것 보다는 용감하게 죽는 편이 낫다는 성현의 말씀을 실천하셨습니다. 밀알이 썩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듯이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성현들에게나 들을 수 있는 아무도 원망하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임락경(시골교회 목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자살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그가 살았던 극
적인 삶만큼이나 충격적으로 그의 삶은 마감되었다. 이제 남은 자들에게 그 충격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가 던져졌다. 그 충격만큼이나 깊게 이 사회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편 가르기가 실시되고 있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며 서로를 향해 주홍글씨를 새기고 있다. 그런데 어느덧 한국교회가 그 대열에 끼어있다. 다양한 성명서와 의견의 표출이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있다. 교회는 다를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가깝기 때문에 더욱 깊은 상처를 주고받는 것 같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를 묶은 줄 알았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우리를 나누고 있다. 한국교회는 아직 깊이 있는 성숙이 필요한 것 같다. 
                                                      조성돈(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사회학 교수)



죽음은 곧바로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유서의 한 부분인“ 삶과 죽
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이 당위적 물음은 우리 모두에게 그의 죽음이, 죽음이 아닌 삶으로 다가오게 하고 있다. 그는 죽지 않았다. 이 사회에 진정한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연대의식과 행동으로 살아있고, 무시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살아있고, 참여정치 의식의 확장으로 살아있다. 우리는 경계에 다 다라서야 비로소 뒤돌아보게 된다. 숲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깨끗한 공기를 숨 쉬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맑은 물을 마실 권리를 내동댕이쳤던 우리는, 또한 내면의 소리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자유, 그 소중함을 누릴 줄만 알았지, 지킬 줄은 몰랐다.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이 절절히 다가온다.
                                   채혜원(한반도 평화통일개발협력 에큐메니칼포럼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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