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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편집장의 편지

떠나라, 삶은 여행이다 ㅣ 편집장의 글

정직한 절망의, 희망

촛대를 샀다. 이제 초를 켤 차례였다.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촛불의 슬픈 눈물을 마시며, 꼭꼭 싸매고 감춰왔던 나의 금기를 그 연약한 빛에 내맡겨야 했다. 더는 버틸 수 없어 곪아 터진 상처를 또렷이 응시하며 견딜 준비를 해야 했다. 눈을 감아도 볼 수 있는 촛불의 춤처럼, 춥고 시려서 홀로 웅크리고 있던 나에게 온통 그분의 따뜻한 기운이 감싸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깊이 침묵했던 만큼 쏟아져 나오는 언어의 소용돌이에, 고요해서 오그라들 것 같던 산 속 침묵 기도원이 나에게는 가장 시끄러운 곳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삶의 분기점에서 나는 살 수가 없어, 아니, 지독히도 살고 싶어, 서울을 벗어나 그곳으로 움직여야 했다. 촛대와 초를 들고…. 그렇게 시작되었다, ‘머무름’을 위한 나의 ‘떠남’은. 두려움의 가면으로 구겨져 있던 나의 얼굴은 며칠의 그 여행 속에서 껍데기를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고, 비로소 벌거벗은 몸뚱이를 마주하며 존재의 시간을 살 수 있었다. 그것은 고단했던 날들의 모든 사연을 토닥이는 그분의 특별한 안식이었고, 전인적인 내가 그분의 섭리 속에서 다시 살아갈 에너지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결국 ‘쉼’이란 내가 얼마나 고단한 지를 인정하고, 이제 그만 참아도 된다며 나를 달랠 때 누릴 수 있는 선물 아닐까. 이는 스스로에게 가장 진실할 수 있을 때 맛볼 수 있는 달콤함이다. 가끔은, 그 ‘떠남’이 없었다면 지금 어디쯤을 헤매고 있을까, 묻곤 한다. 금기로부터 떠나지 못했던 나라면, 아마도 ‘나’로부터 멀리 떠나, ‘나’인 척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때 서울을 떠난 것이 아니라, ‘나’일 수 없게 만드는 익숙한 것들을 떠난 것이었다.
작년 9월에는 한곳에 콕 박혀 머무르기보다는 이리저리 떠돌고 싶은 바람이 들어, 고창 선운사길과 지리산 둘레길, 그리고 담양의 길들을 밟기 위해 떠났더랬다. 이건 ‘방랑’을 위한 나의 ‘떠남’이었다. 산 전체를 품에 안듯, 에둘러 돌아가는 지리산 둘레길은 늘 정복하듯 산을 오르기만 했던 우리네 삶을 타이르듯,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도 걷는 이가 없었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무언가와 조우하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산이 아닌, 햇살에 빛나는 숲속 나뭇잎과 길가에 피어있는 야생화, 황금빛 곡식으로 익어가고 있는 다랑논, 정겨운 동네 할머니의 수박 한쪽과 같은 소소한 일상의 풍경이었다. 삶의 복잡한 질문을 안고 찾은 지리산 둘레길은 자연과 사람, 마을과 마을, 산과 들의 이어짐을 말없이 가르쳐주며,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도 역시 길임을 깨닫게 했다. 그 길은 완성되지 않은 길을 걷고 있는 나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결국 ‘여행’이란 우리 앞에 펼쳐진 길을 걷는 일이고, 채 완성되지 않은 길조차 걸어낼 수 있는 일이며,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의 꿋꿋한 ‘삶’처럼 말이다.
그러나 ‘삶’은 때로 먹먹하기 짝이 없도록 가혹하다. 이상하게도, 힘들다고 인식하는 순간은 늘 ‘지금’인 것 같다. 이미 지나고 넘어왔는데도 또 무언가가 아직 남았고, 새로 다가오기도 하니, 삶은 어쩌면 그러한 ‘지금’의 무수한 반복인지도 모르겠다. 면역력의 결핍인지, 망각의 습관인지‘, 지금’에 충실하려는 내 존재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먹먹함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삶’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끄덕여본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가야 할 지 캄캄해져 버린 ‘지금’, 다시 촛불이 필요함을, 안 보이는 길을 만들어가야 함을 깨닫는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예민한 나의 감수성에 감사하며, 정직한 절망으로, 온전히 절망하겠다. 그 절망이 반드시 필연적 희망으로 이어질 운명임을 믿기에. 상처받기를 선택할 수 있는 모험 후에야, 비로소 그 상처로부터 떠날 수 있을테니, 머물기 위해서든, 방랑하기 위해서든, 다시 떠나야 할 때가 왔다.                                                                                                   

편집장 노영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