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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09 07-08 떠나라, 삶은 여행이다

떠나라, 삶은 여행이다 1 ㅣ 그냥 가, 마음은 눕고 몸은 일어날 거야

청탁을 받고 돌아보니 오래 전 일 같습니다. 아내와 함께 동해, 남해, 서해안 길을 걷고 <아내와 걸었다>는 책까지 냈던 일이요. 그 뒤인가요. <아내가 결혼했다>는 소설책과 영화가 나왔었지요. 이에 비하면 <아내와 걸었다>는 참 덤덤하고 심심하고 소소한 일처럼 다가옵니다만, 아내와 걸어보는 것과 같은 작은 관계와 작은 행위들을 포기한 결과 우리의 삶에 파행과 위기가 온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저 스스로 참 대단한 일을 했다는 생각도 드네요.

생에 유혹이 찾아올 때
그랬습니다. 어느 날, 떠난 겁니다. “어느 날 떠났다”라고 하는 이 한 줄 문장 안에서 우리는 참많은 고민을 합니다. 언제 떠나지? 누구랑 여행하지? 어디로 갈까? 갈 수는 있을까? 간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렇듯 수많은 주저함의 유혹들이 우리 마음을 칭칭 휘감고 말지요. 그러나 일단 만사 제치고, 아니 제친다기보다 살짝 까먹은 것 같은 상태로 떠나고 보면, 그 주저함이 불가피한 생의 짐들 때문이 아니라 실은 유혹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길 떠나보자고 하는 순간부터 생기는 유혹, 그것은 한사코 길 떠나지 않아야만 할 것 같은 유혹들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 유혹들과 한
참을 마주하고 씨름한 다음에야 “아, 아무런 답이 없네, 그냥 떠나자.” 하고 떠난 겁니다. 그랬더니 길 떠난 첫날부터 아내와 나는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길을 걷고 또 걸으며 몸은 기분 좋게 고단해지고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 겁니다.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집에 왔다가 다시 떠나기를 반복하며 65일을 걸었는데요. 책을 내고 나서 여기저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렇게 길 떠나면 좋은 게 뭔가요?” 같은 질문을 받았고 늘 했던 대답이 있습니다.

길에서 새롭게 서로를 만나다
아내와 걸었다고 하니 둘이서 참 많은 대화를 나누었겠구나, 짐작하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전혀 안 그랬답니다. 아내와 나는 길 걸으면서 딱 세 가지 종류의 말만 주거니 받거니 했거든요. “좀 천천히 가” 또는 “좀 빨리 와”, “지금 밥 먹자”와 “많이 배고파?”, “오늘은 그만 걷자”와 “그럴까?”, 이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내와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한 동료애와 애정을 느꼈습니다. 길을 걸으며 아내와 나는 나란히 걷기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었는데, 그럴수록 아내는 내 등을 보았고 나도 아내등을 오래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좋았답니다. 길 떠나기 전에 우리는 사랑해서 가정을 이루었지만 서로 일 때문에 바빴습니다. 마주보는 시간이 귀했습니다. 하여 겨우 마주보는 자리가 만들어지면 좋아했지만 그때뿐 금세 다시 공허함에 시달렸지요. 그러다가 어찌어찌 하여 어느 날 떠난 것인데요, 물론 떠나기 전에는 아내와 같이 길을 걸으면 대화도 많이 하고 그럴 줄 생각했습니다만, 앞서 말씀 드렸듯이 안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게 더 좋았던 겁니다. 마주보는 시간을 늘려야 좋을 줄 알았는데, 반대로 서로 뒷모습을 오랜 시간 고즈넉이 우두커니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져서 좋았던 것입니다. 그 경험을 통해 아내와 나는 서로를 좀 더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낌으로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부부를 인생의 동반자라고 합니다만, 동반자라면 마주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주보는 것이 부족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등을 봐주고 뒷모습을 지켜주는 관계를 몰라서 탈이 나는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전 노무현 대통령을 보아도 그렇지요. 그와 우리가 마주보았던 날들에는 애정과 섭섭함과 욕설이 난무했습니다만, 우리는 그의 뒷모습을 볼 줄 몰랐고 그가 뒷모습으로 살아가려고 한 작은 일상을 지켜줄 줄 몰랐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부부도, 선후배도, 친구도 우리는 서로 앞모습 뿐 아니라 뒷모습도 보아야 합니다.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 한 가지
“사는 동안 서서히 작아지고 사라지는 것을 격려해주고 지켜봐주는 한 사람이 곁에 있으면 충분하다. 고맙게도 아내는 나를 사랑한다.” 라고 책에 썼었었는데요, 이런 깨달음을 맛보았던 것 역시 아내와 함께 길 떠났던 덕분입니다. 대화란 고작 그 세 가지 정도의 이야기로도 충분했고, 보고 또 봐도 넉넉했던 것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우리가 지켜주었던 서로의 등, 그 뒷모습이었습니다. 그 날들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서로를 믿고 기다려주고 수용할 줄 알게 된 것이겠고요. 삶이 여행이라면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한번쯤 길을 떠나서 길을 걸어볼 일이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하니 한번 떠나보시겠어요? 아마도 당장에 101가지도 넘는 ‘길 떠날 수 없는 이유’들이 마음에 꽉 들어찰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렇다고 바로 포기하지는 마세요. 그냥 그 이유들 하나하나를 가만히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그 직면과 사색의 시간을 꼭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이유라는 것들이 앞서 말했듯 내 생에 들러붙은 불가피한 짐이 아니라 내가 언제든 잠시나마 뒷전으로 밀어놓아도 괜찮은 선택 가능한 유혹들이라는 걸 보게 됩니다. 이렇게 그 이유들이 내 앞에서 작아지는 시간이 쌓이는 어느 순간, 그 어느 날 훌쩍 그냥 떠나는 겁니다. 저는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모른답니다.



김종휘|하자센터에서 부센터장 일을 하고 있다. 하자센터는 청소년들의 창의적인 직업 모색과 생애 설계를 도모하고, 청년들이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너와 내가 서로를 살리는 방식으로 삶과 일을 발견하는 것을 돕는 곳이다. 하자센터에서 노리단이라는 문화 공동체를 만들었고, 지금은 또 다른 공동체 회사들을 만드는 걸 돕고 있다. 그 전에는 방송을 진행했고, 문화기획자와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음반기획사를 차려 음악과 공연 활동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