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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재 종료

노무현을 생각하다 2


‘노무현’이라는 시대의 아픔을 떠나보내며, 많은 이들이 먹먹한 가슴으로 할 말을 잃었다고 했다. 어떠한 언어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캄캄하기만 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도 있었고, 생각을 정리할 수 없어 펜을 놓은 이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 그런’ 우리의 마음이 있다. <오늘>을 통해 만나왔던 사람들의 조금씩은 다른, 그러나 조금씩은 같은 마음. 같은 시대를 산다는 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이 마음의 갖가지 결을 들여다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여유가, 이제는 있었으면 좋겠다. 너와 나의 입장과 견해가 다르더라도, 귀를 기울이고 들어볼 줄 아는 넉넉한 마음과 함께 성찰해보려는 움직임이 더욱 소중한 지금이다. <편집자주>



‘노무현’이 남긴 가치의 부활

죽음은 과연 영원한 소멸인가? 기독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사건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문이라고 받아들인다. 죽음은 그래서 기이하게도 생명의 사건과 한 몸이 된다. 그러기에 ‘부활’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사라지고, 소멸의 운명에 처했다고 여긴 존재가 도리어 새로운 힘으로 역사의 중심에 서는 지진 같은 사태가 된다. 예수를 죽여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토벌하려 했던 자들은 그 예수가 도리어 무수한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 살아나 더 큰 힘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에 경악하게 된다. 이들은 하나를 죽이면 모든 것을 죽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믿었지만, 하나가 죽어 여럿이 되고 그 여럿을 죽이니 더 큰 여럿이 되어가는 ‘부활의 진화와 성장’을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 ‘부활’이 헬라어에서 ‘집단적 저항과 봉기’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는 까닭은 달리 있지 않다. 기존질서가 토하는 죽음의 힘에 짓눌려 숨죽이고 지냈던 생명이 다시 기력을 찾고 전격적으로 소생하면, 역사는 바뀌게 되어 있다. 부활은 그래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시간의 탄생이다.

거룩한 바보, 예수
그리하여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는 맺지 못한다는 나사렛 예수의 말씀은 십자가 처형 이후 비로소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절절히 깨달아졌다. 강력한 생명력을 가진 존재와 운동의 탄생은 기이하게도 죽음도 불사하는 의지가 억압적인 현실과 치열하게 마주하는 과정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벌인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줄 알고 있었지만 그 길을 바꾸지 않았다. 그건 제자들이 보기에 이미 자살행위에 가까운 위험한 선택이었다. 나사렛 예수로서는 그러고도 살아남을 줄 알고 한 운동이 애초부터 아니었다. 제자들의 눈에 비친 예수는 천하의 바보였다. 그러나 그는 ‘거룩한 바보’였다. 계산하는 자들에게는 앞뒤를 못 가리는 존재로 보였을 것이며,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조차도 과도한 이상주의자로 여겨졌을 것이며 재판에 넘겨진 이후 채찍으로 찢겨나간 살과 부서진 뼈로 이미 피투성이가 된 그의 육신은 더 이상 조롱하려 해도 조롱할 것마저 남지 않은 듯이 생각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거룩한’ 바보인 이유는 이 모든 사건 배후에 하나님의 뜻이 관철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 깊이 주목해야 할 바가 있다. 예수는 그냥 죽은 것이 아니었다. 죽임을 당했다. 예수를 죽인 자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한다. 그걸 통해 자신들이 두려운 존재임을 일깨우고 자기 힘의 강대함을 모두가 받아들이기를 기대한다. 예수를 죽인 로마제국의 지배자들과 예루살렘의 지배세력들은 당대의 역사에서 주류에 속하는 자들이었고, 그들은 갈릴리라는 비주류의 목소리가 공의와 생명을 부르짖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이를 살해할 기회를 찾는다. 예수는 그 목소리를 압축한 존재였으니 그가 이들에게 타살당하는 것은 예견되는 사건이었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 포도원 농부의 이야기가 있다. 이들 농부는 주인이 보낸 하인들을 하나하나 때리고 쫓아내더니 급기야는 상속자인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 포도원 밖에 그 시신을 내버린다. 그들은 그렇게 하면 세상이 그들의 힘을 무서워하고 떨며 감히 대들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지만, 그건 결국 그들의 죄를 온 세상에 드러낸 일이었다는 것을 자신들은 모른다. 주인은 어떻게 하는가? 이들 농부들을 추방하고 새로운 농부에게 이 밭을 맡긴다. 역사의 주도세력이 교체되는 것이다. 예수를 죽인 자들도 십자가에 그를 매달아 자신들의 힘을 과시했지만, 그건 그들의 죄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일이었으며 부활사건으로 이들은 인류의 역사가 존속하는 한 끊임없이 지탄의 대상으로 남게 되었다.

죽음과 삶의 거대한 역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사회의 비주류였다. 그의 당선은 이 사회주류세력에게 충격이었고 그를 땅에 묻는 것이 자신들의 기득권 질서를 되살리는 기본조건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 그 자신의 오류와 실수 그리고 정책적 잘못이 모두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지향했던 가치는 적어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 그리고 서민들의 삶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한국사회 주류세력은 이 가치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지속적으로 정치적 공격과 정치적 타살을 반복해왔다. 확인되지 않은 부패 스캔들이 사실처럼 공표되었고 그를 정치적으로 살해하는 것으로서 지난 시기의 민주주의 운동 전체에 대한 사형선고를 내리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모든 구상과 계획은 일거에 뒤집히고 만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방식으로서야 자살이나, 그 맥락이 타살이라는 것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식하게 되었고, 애초의 슬픔과 충격은 분노로 바뀌었으며, 그의 죽음 속에 내장되어 있는 저항의 의지까지 감지함으로써 ‘노무현’으로 압축된 가치가 부활의 무대에 전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5백만이 넘는 조문행렬과 서너 시간씩 아무 불평 없이 기다린 분향 인파, 그리고 현 정권에 대한 지탄은 노무현에 대한 영웅적 미화과정이 아니라, 이 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갖가지 억압과 불의, 그리고 기득권세력의 탐욕을 보다 명확히 본 결과였다.

죽은 자가 도리어 이들의 마음에서 살아나고, 죽인 자들은 산송장처럼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을 우리 사회는 경험하게 되었다. ‘거대한 역전’이었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이 사라지고, 인간의 역사에 관철되는 하나님의 섭리는 성서 안에서만 제한되어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역사의 주체세력이 누가 될 것인지 깨우치는 포도원 사건은 현실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졌는데, 무수한 열매가 맺힐 기세를 보이고 있다. 죽음은 정녕 소멸이 아니로구나.

김민웅|성공회대 NGO 대학원에서 교수로 가르치고 있으며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기획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자유인의 풍경>, <밀실의 제국>, <보이지 않는 식민지>, <사랑이여 바람을 가르고>, <물 위에 던진 떡>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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