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전 버려야 할 것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에서 돌아와 고향인 제주에 제 2의 까미노를 개척한 여인의 이야기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걷기여행>은 이러한 내 열망에 강렬한 불꽃을 일으켰다. 아름다운 섬에서 하루 종일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항공권을 예약한 후 한 달 가량을 ‘걸을 수 있는 다리’를 만드는 데 투자했다.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 다녔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했으며, 퇴근길에는 몇 정류장 먼저 내려 동네 골목길을 탐험했다. 자주 사용하지 않아 점점 퇴화하고 있던 더듬이와 근육을 일깨우는 작업을 한 것이다. 효과는 의외로 금방 나타났다. 느른하던 일상이 쫀득쫀득해졌다. 실현 가능한 단기적 목표와 그것의 성취로 인해 몸과 마음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노란 유채꽃이 그 색과 향기를 뽐내는 매혹적인 계절, 제주 올레에 섰다.
올레를 시작하기 전,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그것은 내가 경계하고 버려야 할 것들이었다. 첫째, 사진 찍기에 대한 욕심. 여느 관광지 순회하듯 셔터 누르기에만 급급한 여행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두고 대상의 본질에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소박한여행을 원했다. 둘째,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고 오겠다는 욕심. 시간의 여백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빈틈없이 꽉 짜인 여정 안에 갇히는 어리석음 대신 그저 길 위에 있음 그 자체를 즐기자고 마음먹었다. 셋째,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나약함. 나의 올레는 코스의 시작과 끝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준비하고 찾아가고 돌아와 마무리하는 전 과정에 의미가 있는 것이니,어지간한 불편함은 감수하는 게 당연했다. 넷째, 길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길치인 내가 올레의 상징인 파란 화살표를 제때 찾아 코스를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두려움 역시 던져버리기로 했다. 미지의 땅에 길을 내고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는데, 앞선 이들의 열정과 노력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는 길을 걷다 잠시 방향을 잃는다한들 그게 뭐 대수인가! 잃으면 다시 되찾으면 될 일이었다. 아니 새로운 나만의 샛길을 만들면 또 되는 일이었다.

우도의 유채와 파밭

길에 온전히 나를 맡길 때

이렇게 시작한 올레였지만, 역시 변수는 곳곳에 숨어 있었다. 서두르지 말자고, 시간에 쫓길 필요없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나는 또 어느 새 종종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금만 욕심을 부려도 온전하지 못한 왼쪽 발이 ‘무리’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제야 나는 다시 속도를 늦추고, 목적지에만 집중돼 있던 신경을 흩트려 내 오감과 주변 사물에 분산시켰다. 그러면 들리지 않던 숱한 소리들이 내게로 왔다. 바람막이 모자를 사이에 두고 모진 바람이 귓전을 두드리는 소리, 구름이 말하는 소리, 현무암이 내뿜는 숨소리, 밟혔던 길가의 풀들이 다시 꼿꼿이 몸을 세우는 소리, 이방인을 구경하는 휘파람새 소리, 그리고 내 마음 흘러가는 소리, 내 심장의 피가 기뻐 춤추며 온몸 구석구석을 순례하는 소리가 들렸다. 걷는다는 건 바로 이런 강약의 조절, 욕망의 컨트롤, 긴장의 이완, 오감의 충족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올레에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중 어떤 이들과는 바람처럼 스쳤을 뿐이지만 어떤 이에겐 경직돼 있던 내 마음 때문에 뜻하지 않게 상처를 주었고, 반대로 대부분의 경우에 조건 없이 과분한 호의를 받았다. 나는 아직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지는 역사적인 지점이 과연 어디인지를. 확실한 것 하나는 모든 두려움의 출발점에는 대상을 ‘알지 못함’에서 비롯한 오해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길 위에서 만난 그 누구보다도 나를 설레게 하고 때로는 당혹스럽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예닐곱 살 기억 속의 나와 지금의 내가 공존하며 얘기를 주고받는 올레. 그 어떤 시간보다도 ‘나’ 자신으로 충만한 여행, 종일 먹지 않아도 허기가 느껴지지 않는 영혼의 포만감을 주는 여행이었다. 그러니 올레를 떠나오기가 무섭게 또 다른 올레를 꿈꾸고 그리워한다고 해도 올레 꾼에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방옥|스물아홉 되던 해를 기점으로, 길들여진 나를 거부하고 곁길에 한눈을 팔기 시작하다. 늘 ‘붙박이 채송화’ 같은 삶은 살지 않겠다고 큰소리치지만 정작 떠나기 직전이면 뿌리째 흙에서 뽑혀 나오는 것 같은 분리의 고통에 시달린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욱하는 예민한 성정이 풀꽃과 나무 앞에만 서면 어린 양처럼 온순해지는 특이체질을 가지고 있다.

* 제주도 올레길 www.jejuolle.org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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