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양>은 이 세계에 편만한 고통에 특별한 방점을 찍는 영화다. 여주인공 신애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뒤집어 씌워 놓고, 그 하중에 깔린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참상을 바라보는 우리는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고 또 묻는다. 그 질문에 응답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에 앞서 대중영화를 통해 이렇게 진지하고도 깊은 질문을 만나는 일 자체가 이 시대에 누리기 어려운 축복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등’에 감춘 고통
영화는 처음부터 신애의 ‘등’에 주목한다. 우리 눈에 세계의 전면만 보이듯, 신애 역시 자신의 후면을 볼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자신의 등, 그 뒷모습을 응시하는 데서부터 다른 물음이 시작된다. 그 처음은 신애가 밀양으로 이사하고 생계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첫 날, 아들의 손을 잡고 피아노학원 홍보전단을 붙이러 가는 뒷모습이다. 신애는 이제 새 삶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하지만 그 삶은 전혀 ‘새’ 삶이 아니다. 남편은 죽었으나 신애는 여전히 남편의 그늘 속에 살고 싶어 한다. 남편을 못 잊어서가 아니라 그게 안전하기 때문이다. 밀양에 내려와 살기로 한 것은 미처 제 상처를 들여다볼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신애가 선택한, 가장 게으르면서도 영리한 전략이다. 남편의 죽음은 알리되 그의 배신은 감출 수 있는 곳. 죽은 남편의 유지를 받드는 열녀로서의 이미지를 방패삼아 자신의 불행과 고통은 덮을 수 있는 곳. 그러니까 신애는 밀양에서 다른 이름으로 호명 받고 싶은 것이다. 고통의 바닥에 처한 인간이 택한 참담한 인정투쟁이자 첫 줄부터 구멍을 안고 쓰기 시작한 부실한 각본이다. 구멍은 생각보다 빨리 실체를 드러낸다. 땅에 투자하겠다고 호기를 부리고 노래방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동안 아들이 유괴된다. 반쯤 넋이 나간 채 유일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한 종찬을 찾아가는 신애의 뒷모습을 카메라가 두 번째로 잡아낸다. 카메라는 신애가 흔들리는 만큼 함께 흔들린다. 마침내 도착한 종찬의 카센타에서 신애는 마이크를 들고 제 노래에 취해 있는 종찬을 발견한다. 그는 그나마 등을 돌리기까지 한다.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널 수 없는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거리가 발생한다. 신애는 그만 주저앉고 만다. 끝까지 자기를 지켜봐 줄 거라고 믿었던 사람이, 가장 절박한 순간 자기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만 것이다.
아들을 잃은 뒤 고통에 빠져 있던 신애는 갑작스레 기독교신앙에 귀의한다. 하나님이라는 전혀 뜻밖의 연인과 만나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면서 평안을 얻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 와중에 컴컴한 부엌 싱크대 앞에 서서 밥 먹는 그녀의 뒷모습에 한 번 더 주목한다. 여전히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없는 그녀의 뒷모습은 어둡고 외롭고 절망스럽다. 그 등 뒤에서 아들이 살아 돌아다닌다. 눈에서는 죽은 아들이 후면의 세계에서는 아직 죽지 않은 것이다. 집요할 정도로 반복해서 보여 지는 신애의 뒷모습은, 결국 그녀가 전면을 향해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후면에서 몰락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딛고 일어서는 듯하지만, 실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보이는 햇빛에 드러난 고통과의 싸움
아들의 발소리에 혼란에 빠진 신애는 용서가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고 유괴범을 ‘제대로’ 용서해 보기로 작정한다. 제대로 용서하는 일, 다시 말해 그에 대한 용서를 주변에 과시함으로 ‘열녀’보다 한 수 위인 ‘성녀’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어 절망을 치환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하다. 하나님이 먼저 그를 찾아가 용서하셨다고 하니 말이다. 자기 입으로 용서한다는 선언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노골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영화가 반으로 접히면서 펼쳐지는 분기점이 된다. 마침내 신애가 미뤄온 싸움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싸우기 시작한 그녀를 미친 여자 취급하지만 실은 그 싸움이야말로 신애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녀가 비로소 주체로 서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실 스스로 싸우지 않는 한 용서도 없고, 치유도 없으며, 누구도 그녀의 고통에 접근할 수도 없다. 그녀의 고통이 절대적이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고통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싸움을 거는 대상이 그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은 고통과 싸우는 인간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보내시지만 싸워 마땅한데도 싸우지 않는 인간에게는 싸움을 부추기신다. 왜 고통 받게 되었는지 의심하지 않으면 고통의 원인을 규명하는 일도, 그 의미를 해독하는 일도 역시 불가능하다. 필요한 것은 의심하면서 싸우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애를 일으키기 위해 싸움을 부추기신다. 가혹한 싸움을 통해 스스로 의미를 찾고 규명하는, 어제와는 다른 인간이 되라고 요구하신다. 예측하지 못한 사랑의 방식이다.
신애의 싸움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부분은 약국집 장로와 벌이는 야외 돗자리 신이다. 신애는 장로를 유혹하면서 하늘을 향해 거꾸로 뒤집힌 얼굴로 소리 없이 외친다. “보여? 보여? 보이냐구?” 야유하듯 절규하는 신애의 얼굴을 직부감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은 사실 하나님의 시선이 아니다. 수직적인 위계구조 속에 그 동안 그녀를 내리눌러왔던 권력적인 응시, 아니 감시의 시선이다. 싸우지 말고 순응하라고, 질문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가르쳐 주는 대로만 살라고, 세상이 호명하는 대로 그 이름만큼만 살라고, 남편의 아내이자 아들의 엄마로 살면, 열녀이자 성녀의 이미지를 걸쳐 입고 살면, 불행조차 덮을 수 있을 거라고 훈육하고 길들인 시선이다. 그것은 보이는 햇빛, 빈틈없이 쏟아지는 가혹한 응시의 햇빛이다.

보이지 않는 햇빛이 비추는 희망
신애의 오해와 달리 하나님은 보이는 햇빛의 그늘에, 보이지 않는 햇빛으로 존재하신다. 하늘에서 땅과 구별되는 고정된 실재로서 내려다보시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그녀가 볼 수 없는 등을 지켜보신다. 그녀가 흔들리면 함께 흔들리신다. 그녀가 누운 채 하늘을 향해 절규할 때조차 그 바닥에 깔려 그 외침을 들으신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을 보는 존재, 우리가 현실의 구멍을 환상으로 대체하려 할 때 단호히 그 환상을 박살내는 존재, 우리를 가혹한 궁지, 참담한 한계상황까지 몰아붙여 결국 그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존재, 외부에 서 계신 듯 내부를 드나드는 존재, 그래서 외부와 내부, 초월과 내재의 경계조차 허물어버리는 존재, 그래서 결국 보이지 않아서 볼 수 없다고 생각한 세계를 볼 수 있게 하는 존재, 그 분이 하나님이다. 신애가 싸움을 계속하는 한 하나님은 동쪽과 서쪽에서, 외부와 내부에서 그녀의 외침을 들으시고 그 모습을 지켜보신다.
영화의 마지막, 신애는 종찬이 들고 있는 거울 앞에서 제 손으로 머리를 자른다. 지칠 대로 지친 표정이지만 제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스스로 가위질을 해 나가는 모습을 통해 그녀는 다른 형태의 싸움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는 희망을 내비친다. 그녀는 환상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들고 있는 현실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놀라운 장면은 힘겨운 고통의 와중에 있는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와 고통을 나누고 싶어 하는 주변이웃은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통 받는 인간이 스스로 싸우는 주체가 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을 돕는 일이다. 그래서 모두가 주체가 되도록 일으키는 일이다. 서로가 망가져가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똑바로 볼 수 있도록 거울을 들어주는 일, 혹은 그 거울이 되어주는 일이다. 서로가 계속해서 싸워 나갈 수 있도록 바닥에서 응시해 주는 일이다. 그 싸움을 통해 세상의 호명을 벗어버리고 스스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생산해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일이다.
“너희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다는 사실을 일깨우시는 하나님(계 3:16),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하시는” 하나님(계 3:19), 그러면서도 “나를 억누르지 않고 오히려 내가 말씀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는” 하나님(욥 23:6). 그 하나님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절망의 끝, 고통의 한계상황을 경유하여 다른 인간이 될 가능성을 얻는다. 결국 신애의 싸움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신정|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영상미디어를 공교육과 사회교육에 연결시키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제5회 서울기독교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으로서 현재 한살림교회 전도사이며,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문화예술교육진흥원 등에서 영화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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