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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재 종료

‘그 바보’, ‘찬란한 유산’ 만나다

<그저 바라보다가>의 김아중 Vs <찬란한 유산>의 이승기


TV드라마 앞에는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다. 영화 같으면 돌을 던질 만한 뻔한 로맨스도, 알고 속아주게 된다. 갑자기 영화감독들이 불쌍해지기도 하고…. 상반기에 내가 본, 딱 두 편의 연속극, 시청률에서는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있었지만 삶의 비슷한 궤적을 그렸던 두 젊은이를 불러냈다. <그저 바라만 보다가>의 한지수(김아중 분)와 <찬란한 유산>의 선우환(이승기 분)!

뭐든 대가를 지불하면 되는 거였다
선우환(이승기):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내 장난감을 주우시려다가 자동차에 돌아가셨어요. 엄마는 과부가 되고, 할머니는 유산을 이어받을 후계자를 잃어버렸죠. 나 때문에 모두 불행해졌어요. ‘차라리 날벼락이라도 쳐라. 농약은 너 같은 놈 쳐 먹으라고 있는 거다.’ 온 몸 구석구석 저주를 쏟아 부었던 것 같아요. 내가 아빠를 죽게 했으니까. 할머니가 쌓아올린 찬란한 유산을 이어받을 후보 0순위였지만 자동적으로 그것을 밀어냈어요. 술 퍼마시고, 없는 사람 무시하고, 개망나니가 되어갔죠. 벌받으며 사는 게 아빠에게 속죄하는 길이었으니까요. 다 잊을 수만 있다면…. 요즘 운동화 빨아주는 가게도 생기는데 뇌를 세탁해 주는 건 없나. 차라리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다. 바보처럼 웃어본 적이 있었던가?
한지수(김아중): 바보…. 난 그 바보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인데…. 환이 씨 말대로 바보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냥 웃더라구요. 처음에는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전염이 되더군요. 난 그 후로 바보를 찬양하게 되었죠.
한: 똑똑하게 딱 부러지게 사는 인간들, 다 겁이 많아서 그래요.
수: 맞아요. 다들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라고 플래시를 날려댔지만, 너무 무서웠어.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 내가 뭘 선택할 수 있겠어요. 그냥 그 남자가 나를 구원해 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한: 알고 보니 그 놈도 맹인이었다? 그 맹인이름이 ‘김강모’? 간지 나고 집안 좋은?
수: 다 앞 못 보고 사는 거지. 캄캄할수록 뭐라도 잡으려고 버둥거리지. 프로이트가 그랬다잖아요? 행복하기 위해 두 손에 있어야 할 것. ‘일과 사랑’ 난 둘 다 잡았다고 믿었죠. 강모 씨는 대가를 지불하면 안 될 일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었어요.
한: 나 같았는데? 울 할머니가 전국에 쫙 깔려있는 식당 사장님이었으니까 돈이면 안되는 게 없었어요. ‘다들 고상 떨지만 돈다발 뿌리면 내 발 앞에 무릎 꿇는다’는 생각을 했죠.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할머니였어요. 설렁탕 팔아서 큰 부자가 되었는데 구질구질한 밥 한 그릇에 목숨 거는 거예요. 뭐 좋은 고기를 써야한다나? 그리고 직원들이 가족이라나? 왜 걔네들이 가족이야? 다 할머니 돈 뜯어먹으려고 붙어있는 것들인데…. 사원아파트를 해주고 존댓말을 써가며 비위나 맞추고. 노인네가 고리타분하게 경영마인드가 없어요. 남아도는 게 인간들인데 확 잘라버리고 ‘비정규직’ 쓰면 되잖아? 그냥 일시키나? 대가를 지불하는 건데 소처럼 일만 시키면 되지.

사람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다

수: 나도 강모 씨 외에는 다 병풍처럼 생각했었어요. 길가의 돌멩이처럼 내가 밟고 지나가는 존재. 강모 씨가 우리 관계를 숨기기 위해서 어리버리한 구동백(황정민 분)과 위장결혼을 하라고 했을 때 그런 마음이었어요. 착한 사람을 이용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뭐 대가를 지불하면 되니까…. ‘당신도 나를 이용하면 되는 거지. 필요한 게 뭔데?’ 이렇게 물었죠. ‘하루만 버티자. 하루만 견디자’ 주문을 외우고 있었어요. 그런데 동백 씨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다는 거예요. 믿어지지 않아. 다 나에게 뭔가를 얻어내려고 눈이 시뻘개서 달려들었는데….
거래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난해한 외국어처럼 낯설어 하더라구요. 거래를 하려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 누가 이길까? 무조건 내가 이긴다고 믿었어요. 환이 씨가 말했듯이 ‘돈, 권력, 명예’ 이런 걸 거절하는 미친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마치 오늘만 있다는 듯이 지내는 거예요. 위장결혼이 끝난 뒤에 전리품이라도 챙겨야 되겠다, 이런 실용적인 생각이 없는 거야. 그러한 그를 보며, 그에 대한 마음의 색깔이 바뀌어 갔어요. 죄책감이 미안함으로…. 따뜻함, 친밀함, 고마움, 사랑으로…. ‘악화가 양화를 집어 삼킨다’는 말, 경제학에서는 진리일지 모르겠지만, 난 적어도 사람사이에서는 정반대라고 믿어요. 이전에 내가 했던 생각, 얼마나 철없고 부끄러운 것인지 얼굴이 화끈거려. ‘모든 것이 없어져도 결국은 사랑이 남는다.’ 진리라는 건 구천을 떠도는 귀신같은 게 아니라 사실이에요. 그이의 온기가 내 손에 와 닿으니까 정글이 없어지더라구요. 손에 진짜 ‘일과 사랑’이 담겨 있구요.
한: 가슴이 울렁거려. 내가 겪었던 것과 똑같네. 나만 보고 살았고 그 외에는 보이는 게 없었지. 할머니가 어디서 만난 계집아이에게 유산을 물려주시겠다고 선언하신 이후, 모든 게 또렷해졌어요. 돈 빼고…. 꽉 움켜쥐고 있는데도 그건 모래처럼 빠져나가고, 맨주먹 불끈 쥐고 살아남아야 했죠. 예의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는 손님을 왕처럼 모시느라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렀고, 설렁탕 국물에 화상도 입었어요. 지수 씨처럼 다짐했어요. 한 달만 버티자. 그럼 할머니도 대충 넘어가시겠지. 군대훈련소 들어왔다 치자. ‘진성설렁탕’ 글씨만 봐도 지긋지긋했어요. 첫 출근 날에는 직원들이 한심해 보였어요. 먹고 사는 게 아무리 급해도 이런 찌질한 일이나 하고 살다니…. 한 달 내내 일해도 꼴랑 그 돈 받고…. 루저들이지! 태생이 천한 것들이 정직원이라고 빡빡하게 굴어대고, 내가 사장되면 너희들은 다 아웃이다, 하며 그런 것들하고 같은 부류의 인간처럼 보일까봐 뒷짐 지고 식당외곽을 빙빙 돌았죠. 그게 그들로부터 나를 분리할 수 있는 담이었거든요. 직원들과 섞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사람이란 게 이상해요. 그냥 억지로라도 만나면 뭔가가 벌어지는 거예요. 매일 정기적으로 꾸준히 보니까 쾌쾌한 김치 국물 너머에 있는 그들의 땀방울이 읽혀지고, 꼬질꼬질해 보였던 은성이(한효주)가 보석으로 보이더라구요. 만나면서 영향 받지 않는다는 건, 밥 먹었는데 배부르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거죠.
수: 그래서 가슴 속에 빗장을 걸어 잠그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사람을 만나면 너무 피곤하고 힘든 일인 것 같아요.
한: 그 힘든 일을 자식에게 시키는 부모가 있고, 제자에게 강요하는 선생이 있고, 국민에게 요구하는 정치인이 이 땅에 드글거린다는 게 비극이지.
수: 그 인간들은 그렇게 살라고 하고, 우리는 오늘 만난 거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한: 이렇게 정리하죠. 그 바보, 찬란한 유산과 마주치다!


김창호|입가에는 웃음을 터트리며 기쁨을 누리고, 눈가에는 눈물을 담고 이웃에 아픔에 공감하며 살고 싶은 사람. 본명보다는‘ 짱오’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주중에는‘ 대학로 동숭’에서 젊은이들을 만나고 있고, 쉬는 날에는‘ 광나루 상담나라’에서 놀듯이 공부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