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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매거진<오늘>/문화선교연구원

강한 수양적 전통: 반듯한 경건, 넉넉한 영성으로!

다시 곰이 되어보자!
오늘도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먹고 살만하면 신앙생활도 대충한다(!)는 교회성장학자들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지금도 열심히 새벽기도회, 금요기도회, 수요예배, 주일 예배, 구역예배... 정말로 많고 많은 예배와 교회 모임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참 역설적이게도 이와 함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참 많은 욕을 먹고 살아간다. 신문을 오르내리는 화나고 찡그려지는 뉴스에는 늘 어김없이 기독교인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대충 신앙생활을 해서 그럴까? 제대로 신앙생활 안하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나쁜 짓을 많이 하는 것일까? 문제는 그 사람들이 대부분 교회의 중직자라는 점이다. 장로, 안수집사, 권사... 왜 나쁜 짓은 소위 말하는 신앙 좋다는 사람들이 더 많이 하는 것일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이유를 대면서 설명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곰이 덜 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곰이 되어보자’ 하고 제안한다. 무슨 생뚱맞은 말이냐고 생각하실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한다. 독자들은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단군신화의 곰, 그리고 환웅이 내건 세 가지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 ‘100일간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어라.’ 우리 한국 사람들은 하늘이 되고 싶어하는 사무치는 몸부림이 있다. 그래서 그 몸부림이 열심히 하는 신앙생활로 나타난다. 그러나 가만히 따져보면 그 몸부림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따라서’ 하는 몸부림이다. 곰처럼 동굴 속에서 오랜 기간동안 몸부림치고 내면화하면서 치열하게 수양하는 내면의 고독이 부족하다. 일과를 시작하면서 시간에 쫓겨서 하는 가벼운(!) QT와, 아이들 아침과 직장시간에 쫓겨서 급히 교회에서 나와야 하는 새벽기도회 시간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단하긴 하지만 말이다. 홀로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때로는 한 구절의 말씀으로 하루를 묵상하며 보내는 여유로움도 필요하다 생각한다. 육체적으로 홀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과 치열하게 부대끼면서도 늘 삶의 자리에서 주를 묵상하는 삶, 내 삶의 한 복판에서 주님과 만나려는 마음의 한 틈을 ‘슬며시’ ‘늘’ 열어두는 것이다. 현대인의 바쁨을 상징하는 ‘도시’ 속에서도 은밀하게 주를 만나려는 절대고독의 ‘광야’를 열어두는 삶의 자세, 그것이 바로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것을 ‘신독’(愼獨, 홀로 있으매 삼가고 조심하는 경건한 태도)이라 불렀다. 그리고 위에서 내가 말한 대로 ‘몸만 홀로 떨어져 있음이 아니라 마음이 늘 고요하게 경건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 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신독’은 ‘몸의 신독’ (身愼獨)이 아니라 ‘마음의 신독’(心愼獨)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나는 제안해 본다. 잘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먼저 제안한다. ‘이제 다시 곰이 되어보자.’ 100일 동안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지내보기로 마음먹은 미련한 곰, 곰이 되고서도 그런 아름다운 삶을 함께 누리고 싶어 함께 할 가족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곰처럼 그런 모습을 한번 다시 회복해 보자고.

반듯한 경건, 넉넉한 영성을 회복하고자!
그러면 정말 ‘곰’은 상징적으로 어떠한 모습일까? 한국 사람이 열심히 수양해서 회복한 원래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일까?
나는 내 나름대로 그 모습을 ‘반듯한 경건, 넉넉한 영성’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라 표현하고 싶다. 먼저는 내가 좀 더 참되고 올곧은 모습으로 서기 위해서 스스로를 반듯하게 세워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일은 참 쉽지 않다. 그러기에 단군신화에도 무려 100일 동안이나, 먹을 것의 유혹을 이겨가며, 답답한 곳에서 살아야 한다고 조건을 내걸고 있는 참 힘든 길이다. 반듯한 마음가짐이 없이는 참으로 힘든 일이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모임만 참석하고, 중직자가 된다고 해서 절대로 ‘반듯해지지’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드러나지 않고, 내가 참되고 진실하게 살려 해도 그게 잘 되지 않고, 그러면서 때로 상처입고 속이 멍들어도 묵묵히 감내하는 ‘곰’이 되어야만 이룰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그렇게 회복된 ‘곰’은 ‘넉넉한 영성’을 지닌 사람들이다. 홀로 그런 아름다운 존재로 변화되었다고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홀로만 고즈넉이 살아가려는 사람은 아직 덜된 사람이다. 곰이 사람이 되고나서 다시 함께 아름다운 삶을 이루고 살고자 가족을 원해 기도했듯이 그 행복을 더불어 함께 나누고자 하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행복이 자신만이 아니라 한 가족에게, 그리고 그 가족이 온 누리의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홍익인간, 弘益人間), 그리고 그 행복을 온 누리의 모든 자연에게도 이루어가려는 (재세이화, 在世理化) ‘넉넉한’ 영성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글의 마무리치고는 너무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결론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나 자신’이 변화되는 자리에 이 세상의 변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 하나 변한다고 세상이 달라지냐?’ 나는 단연코 이 말보다 더 무섭고 달콤한 마귀의 소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도 앞으로 곰이 되어보리라 마음을 다져 본다. 이상은 실현되지 못하는 것이라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끊임없이 다시 바라보게 하고 마음을 다잡게 하는 아름다운 디딤돌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낭만적이고 naive 하기만 하고, 학자적인 글쓰기가 아니라고 보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것은, 차가운 이성에 호소하는 현학적인 글보다는 마음으로 전해지는 감성적인 글이 더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글로 이제 <오늘>의 연재를 마치게 된다. 내가 알지 못하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짧은 글과 짧은 기간이었지만 참 행복했다. 그리고 이렇게 정성이 뚝뚝 묻어나는 향기 나는 잡지를 만들어내시는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 글을 연재하면서 힘들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뜻밖에 평생을 함께 할 좋은 친구 <오늘>을 얻었다는 것이 태어나 처음으로 연재라는 것을 해 보면서 느낀 가장 큰 기쁨이다. 그래서 난 지금 참 행복하다^^ 언젠가 곳곳에서 들리는 아름다운 ‘곰들’의 안부를 듣기 바라면서...

배요한|넉넉한 덩치와 땀 흘리는 운동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목사. 성경책 말고도 논어나 도덕경을 읽으면 마음이 흐뭇해져서 즐겨 읽다보니 어느덧 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장신대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