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을 읽다/TV 상자 펼치기

TV 상자 펼치기 5 |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 다르다

언젠가 심심파적으로 아들아이에게 물었다. 네가 바라는 어머니상이란 게 혹시 있냐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에게 대답하기 어려우면 배우 중에서 골라보라 했더니 대뜸 “아, 맞다! 한상궁.”이라 답하는 게 아닌가. 드라마 <대장금>의 장금이 스승인 한상궁(양미경)을 일컫는 게다. 물론 애당초 “엄마 같은 엄마가 최고지!”라는 식의 답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제 어미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단아하고 기품 있는 한상궁이 내 아들이 원하는 어머니상이었다니. “띠리리~~”하는 효과음과 더불어 털썩 주저앉을 일이지 뭔가.

자식들의 희망사항, 희생적인 어머니

우리 아이야 이처럼 품위 있고 다소 냉철한 한상궁을 뽑았지만 대개는 고두심이나 김해숙으로 대변되는, 희생적인 어머니를 연기한 배우들을 많이 거론하지 싶다. 자기 자신보다 무조건 가족을 우선으로 여겨야 하고, 살림에 빈틈이라곤 없고, 어느 누구보다 탁월한 손맛을 가지고 있어 뭐든 먹고 싶다하면 단박에 뚝딱 만들어 내줄 수 있는 어머니. 아마 이런 유형의 어머니가 대부분의 자식들이 바라는 어머니일 것이다. 그리고 바람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어머니라면 마땅히 저래야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그야말로 자식들의 희망사항일 뿐.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만 봐도 얼마나 다양한 어머니가 존재하나.
드라마 속 어머니들인 한자(김혜자)와 은아(장미희), 이석(강부자)은 자식을 끔찍이 아낀다는 점 하나만 같을 뿐 누가보든 전혀 다른 가치관과 다른 성향을 갖고 있는 어머니들이다. 평생을 가족에게 매여 살아온 한자는 어느 날 갑자기 당당히 안식년 선언을 해 가족들을 기함하게 만들고, 여왕마마이신 은아는 태생적으로 이기적인지라 자신의 취미 생활에 가족이 동참해주길 시도 때도 없이 강요하며, 평소 무탈하다 할 이석도 술만 마시면 감당 못할 주사를 부려 딸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한국의 어머니’와는 거리가 있는 행보이다. 한자의 가출이 심히 당황스러웠던 시청자들은 한자를 이해하는 쪽 시청자들과 갑론을박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저런 엄마가 어디 있어?”라고. 마치 믿었던 자신의 어머니에게 느닷없이 뒤통수라도 맞은 듯 분노했는데 무조건적인 희생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어머니’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걸게다. 어쩌면 자신의 어머니도 그와 같은 선언을 할까 두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락프로그램 속 희화화된 어머니
그런가하면 이경실, 임예진, 양희은 등의 연예인 주부들이 대거 출연해 입담을 겨루는 <일밤>의 한 코너 <세상을 바꾸는 퀴즈>, 일명 <세바퀴>에서 다뤄지는 ‘어머니’는 보통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어머니라 하기 어렵다. ‘어머니’ 보다는 ‘아줌마’라는 호칭이 더 맞는다고 할 수 있겠는데, 흔히들 ‘아줌마’하면 대번에 떠오르는 무례, 무식, 대담함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지라 출연자들의 입담에 박장대소하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하기 그지없다. 환갑 나이에도 외간 남자 앞에서 수줍어하는 어머니들도 있고, 이른바 야담이라면 질색하는 어머니들도 무수히 많건만 이 프로그램에서는 여자가 나이를 먹으면 죄다 뻔뻔해지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는 양 몰아간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어머니상이 희생적이면서도 어떤 상황이든 기품을 잃지 않는 어머니이건만 희화화할라 치면 이처럼 어머니들을 죄다 ‘주책바가지’ 낙인을 찍어버리는 게 기막히지 않나. 어떤 어머니든 각자 개성을 갖고 있다는 걸 왜 인정해주지 않는 걸까?


어떤 어머니는 잘 먹는 게 제일 중요하다 여기고, 어떤 어머니는 잘 꾸미고 사는 게 중요하다 여기고, 또 어떤 어머니는 못 먹고 못 입어도 최상의 교육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여긴다. 이렇듯 어머니마다 각자 모성애의 무게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 다르건만 그를 외면한 채 그저 자신들의 만든 틀 안에 어머니들을 가두려한다는 게 어머니 입장에서 서글프다.

정석희|TV를 사랑하는 대한민국 대표 주부이자 <우먼센스>, <좋은생각>, <매거진T>등의 매체에 글을 쓰는 방송 칼럼니스트. 아줌마의 눈높이로 본 TV 속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재치 있는 입담과 날카로운 시선으로 재미나게 풀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