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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길에게 길을 묻다

내가 사랑한 도시, 베르겐 (Bergen)

노르웨이 호르달란주(州)의 보스(Voss)에서 출발한 기차는 어느덧 베르겐 기차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제 2의 도시, 베르겐에 도착한 것이다. 새로운 도시를 여행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것보다 더 즐거운 것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매력을 찾아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시의 아름다움에 현혹되다
베르겐 기차역을 나와 번화가로 들어섰다. 도시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극작가 홀베르의 동상이 여행자를 반긴다.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마치 동화의 나라에 온 듯 도시는 그야말로 아기자기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항구에 정착한 배들도 그렇고, 항구를 둘러싼 칼라풍의 건축물들도 여행자의 눈을 현혹시킨다. 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아니 그보다 노르웨이 사람들의 도시를 가꾸고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져 질투가 났다. 어느 건물 하나 소홀하거나 대충 지어진 것이 없다. 모든 건축물들은 베르겐이라는 도시에 맞게 잘 짜인 영화 세트장 같다.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다면…. 속으로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주택가를 걸으며 부러운 마음에 남의 담장을 기웃거려보기도 한다. 북유럽의 도시는 왠지 차가울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 도시는 내 예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몇 달간 만이라도 이 도시에 살 수 있다면 숨어있는 감성까지도 튀어나올 것처럼 도시는 너무나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쉴 새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도 내 눈을 의심해 파인더 밖을 자주 봐야했다.


그리웠던 연인을 마침내 만난 것처럼
베르겐은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설렘과 친근함을 동시에 선물해줬다.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며 많은 아름다운 곳을 보며 살아왔지만 이곳은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다. 사람들의 표정 또한 너무나 여유로워 여행자들에게 평안한 쉼과 마음의 안식을 가져다준다. 베르겐에 있는 중세 도시 유적 브리겐은 노르웨이어로 ‘항구’를 의미하며 197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지금은 15채 가량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중세 유럽의 목조건물 속으로 들어가며 세월의 흔적들 앞에 스스로 고개가 숙여졌다. 오랜 시간 고유한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의 정신이 건물 사이사이에서 빛으로 나와 내게 들어오는 느낌이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목조 건물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너무나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이 도시가 사랑을 받는 이유 중 브리겐이 그 중심에 서 있는 것 같다.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차 한 잔 나누는 여유를 누려보고 싶은 곳이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도시를 사랑하는 것이 이렇게 가슴 설렐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마치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연인을 만난 것처럼 나는 이곳에서 진한 애정을 느꼈다. 떠나기 싫었다. 오래도록 머물러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도시를 호흡하고 들이마시고 싶었다. 이토록 낯선 도시가 40대 후반을 살아가는 나에게 쿵쾅거리는 설레는 가슴을 선물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북유럽의 피오르드를 보러왔는데 그곳을 가기 전에 이미 이곳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러한 감정을 행복이라고 부르는 걸까?


백야,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픈 밤
베르겐의 야경은 화려한 인공미는 없지만 노르웨이 사람들처럼 차분하고 사랑스럽다. 밤 10시가 넘었지만 백야 현상으로 인해 아직도 거리는 어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밤이 깊어지면서 도시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간다. 사람들이 떠나고 건물들은 조명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아직 사랑을 끝내지 못한 연인들이 바다를 산책하고 있고 나는 그 바다를 향해 서있는 빨간 공중전화 부스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낀다. 여행 중에 만나는 모든전화 부스는 나에겐 아련한 존재다. 노르웨이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동상이 참많다는 것이다. 맥주잔을 들고 있는 여인의 동상과 아름다운 건축물이 조화롭다. 브리겐의 오래된 목조건물 앞에서 독서로 망중한을 즐기는 여행자들,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여행자라는 사실이 마냥 즐겁다. 한참을 야경촬영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허기와 함께 추위가 몰려왔다. 야경촬영을 마치고나니 시간이 12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아쉽지만 숙소로 돌아가야 할시간이다. 버스정류장에서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막차를 기다렸다. 이곳 사람들과는 다른 설렘으로 승차한 노란 막차버스는 베르겐의 마침표를 찍는 아쉬운 순간이었다.


늦게 찾아온 도시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미처 알지 못한 내 무지가 참으로 미안했다. 노르웨이에서 만난 이 도시는 내 삶을 풍요롭게 해줬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그리움을 선물한 몇 안 되는 도시다. 다시 찾아갈 날들을 꿈꾼다. 돌아온지 겨우 며칠 만에…. 여행하면서 한 번도 하지 않던 야경촬영을 하는 나를 보며 스스로 놀랐다. 내 사진 중에 외국에서 촬영한 첫 번째 야경 사진이다. 그만큼 특별했던 도시 베르겐. 마치 건물들이 여행자에게 안부를 전하며 포즈를 취하는 것 같았다. 늦은 시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곳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는 밤이었다.

신미식|디자인을 전공한 후 15년 가까이 그 분야에서 일해 왔다. 서른이라는 나이에 처음 카메라를 장만하고 17년 동안 사진에 미치기 시작하면서 세상을 향해 새로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람에 대한 애정을 사진으로 담아 내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며 여전히 여행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지독한 방랑벽을 소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