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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재 종료

영화감독과 의사

명문대학 의대에 합격한 제자가 내 앞에 앉아 있다.
“선생님. 저 영화감독이 되는 공부를 하려고 해요.”
“영화감독이 되겠
다고? 와우! 그거 아주 멋진 생각인데! 그런데 왜 그렇게 얼굴이 어둡니?”
“어머니가 반대를 하세요.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저의 어머니는 아버지도 없이 저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오셨잖아요.”
“그럼. 너의 어머니는 정말 좋은 어머님이시지. 어머니
께서 반대를 하시니까 네 마음이 정말 많이 힘들겠구나.”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하면 어머니께서 제가 의사가 되지 않고 영
화감독이 되어도 기뻐하실 수 있을까요?”
“음…. 우리 조금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어머니께서 반대를 하시는 이유가 의대
를 포기하기 때문이니, 아니면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것 때문이니?”
“그게 그거 아닌가요?”
“아니 우선순위를 따져보자는
말이야. 어느 게 먼저니?”
“의대를 포기하는 쪽이 먼저겠죠.”
“그럼. 선생님이 궁금한 것 하나를 먼저 물어보자. 너. 왜 영화
감독이 되려고 하니? 혹시 의대에 다녀보니까 의학도의 길이 너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그러니?”
“아니요. 의대 공부
도 재미있어요. 그런데요. 의사는 한 명만 치료하지만 영화감독은 수많은 사람을 치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의대에서 공부하고 싶은 것이 정신과나 신경과 쪽이에요. 저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참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세상에는 우리 엄마처럼 참 마음 아픈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만져주고 싶었어요. 또 제가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제가 학교 축제 준비를 할 때 기획 능력이 뛰어나다고 선생님께서 칭찬해주신 적도 있었잖아요. 그리고 있잖아요. 선생님. 있잖아요. 제가 영화감독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날부터 심장이 터질듯이 뛰었어요.”
“좋았어. 자, 그럼 우리 이렇게 하자. 너 의학 공부 다 하고 난 다음에 영화 감독되면 어떠니?”
“선생님. 그건 너무 늦어요. 둘 중 하나만 공부하기에도 정말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일이잖아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 두 가지를 동시에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니? 우리 오늘 이야기는 이정도 하자. 내가 오늘 너에게 이메일을 보낼게. 내일 가장 편안한 시간에 읽어보길 바랄게.”
나는 그 날 밤에 기도하는 맘으로 제자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친구야.
난 네가 의학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네가 의학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네가 의대 공부를 하고 의사면허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영화감독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네가 단 한 편의 영화로도 아주 오래오래 사람들의 가슴에 남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시대가 흘러도 그 영화만 보면 아픈 사람들의 마음이 치료되는 의학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오십이 되어서 신인 영화감독이 되어도 이십 년간 열심히 준비해서 칠십이 되어서 영화 한 편 세상에 내놓을 수 있잖아. 네가 살아갈 세상에 칠십은 그리 노인도 아닐 것이고 말이야. 네 심장이 칠십이 되는 그날까지 풋풋하게 뛴다면 네 인생은 얼마나 신나겠니?
또 두 가지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하면 말이야. 너는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의학도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본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의사로서 그들과 만나면서 우리들의 삶에서 영화는 어떤 것이며,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영화에 종사하다가 병원에 온 그들과 영화에 대해 많이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속에 꿈이 있는 사람들이거든. 그들의 상처가 난 꿈들을 소독해주고, 다독거려주면서 그들과 함께 영화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어떠니? 그리고 환자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프로그램을 병원에서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영화가 환자들에게 얼마나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지를 관찰하면 네가 말하는 ‘치유의 의학영화’ 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이건 팁인데 말이야. 네가 그런 준비를 다 끝내고 오십 즈음에 영화감독이 된다고 어머니에게 말씀드리면 어머니는 기꺼이 네 편이 되어주실 꺼야. 반대할 기력이 없으실 나이가 되잖니. 하하. 그건 농담이고, 그때까지 네가 사는 모습을 보신 어머니는 너의 판단을 무조건 존중해주실 꺼야. 물론 그때까지 어머니는 건강하게 살아계시도록 하는 것은 네 책임이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 네 첫 작품은 어머니께 바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영화 시사회 때는 나를 꼭 초대해주렴. 그럼 나는 네 영화 광고해줄게, 그때가 되면 내 제자가 얼마나 많아지겠니? 그 녀석들에게 네 놈 자랑하면서 의무적으로 영화 보라고 내가 명령할게. 이런 이야기하다보니 내가 다 신이 난다. 칠십 청춘 제자의 영화를 구십 난 스승이 광고를 하다! 멋지지 않니?
자! 그럼 심호흡 몇 번 하고 운동화 끈 고쳐 매자. 다리를 튼튼하게 하려고 달리기를 하지만 예상하
지도 못한 심장이 더 튼튼해지는 신비한, 그 마법의 시간을 함께 뛰면서 누려보자꾸나. 친구야, 그대, 장거리 선수야! 그대의 길 위에 영광 있기를 두 손과 마음 모아 빈다.

너의 스승이기에 앞서 함께 꿈꾸는 소년이 되고자 하는 친구 문경보 보냄.

문경보|현재 대광고등학교에서 학생들과 국어를 매개체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마음을 나누는 사십대 중반의 교사. 학생들에게서 느끼는 매력과, 그들의 눈빛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 때문에 늘 학교 탈출을 꿈꾸다가 번번이 포기하는 남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위해 학교를 벗어날 꿈을 늘 계획하는 이중적인 사람. 지금까지 만난 세상과 새롭게 만나기를 오늘도 기도하고 글 쓰고 수다를 떨면서 행복한 나날을 엮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