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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문화동네 사람들

풋풋한 눈빛으로 인생의 무게를 녹여내다 ㅣ 배우 정태우

생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고민에는 항상 ‘쓰임새’에 대한 고민이 잇따른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땅에 발 딛고 서있는가에 대해 삶은 좀처럼 답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꿈과 장래희망,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질문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남들은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확인해야할 것 같은 불안함. 그러다 마침내 누군가는 그 질문에서 자유로워지는 천국을 맛보기도 한다. 하나님 그 분을 만날 때, 그리고 그 분이 내 삶의 주인임을 깨달을 때, 생의 목적 그대로 우리는 그 분의 도구가 된다. 알게 되면 단순해진다. “배우 자체가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쓰이길 원해요.”라는 순전한 고백으로 오늘도 한 사람을 연기해내는 배우 정태우를 만났다. 글 정미희 | 사진 탁영한

소년, ‘알런’이 되다
굵은 웨이브의 파마머리, 근육질의 타이트한 몸, 빛나는 눈빛과 풋풋함이 살아있는 얼굴. 스튜디오에 들어서는 정태우의 몸에는 17세의 알런이 남아있다. 지난해 12월 1일부터 시작된 ‘연극열전 3’의 개막작인 연극 <에쿠우스>에서 주인공 알런역을 맡아 2주간 이어진 매일 공연을 마치고 온 터였다.
연극 <에쿠우스>는 17살 소년 알런이 말 여섯 마리의 두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충격적인 범죄 실화를 연극으로 옮긴 작품으로 1975년부터 꾸준히 무대에 올려졌다. 주인공 알런은 1975년 배우 강태기로부터 시작해 송승환, 최재성, 최민식, 조재현에 이르기까지 당대에 연기력으로 인정받던 젊은 연기자들이 도맡아했던 역할이다. 이번 2009 <에쿠우스>에는 송승환, 조재현이 정신과 의사 디이사트 역에, 정태우, 류덕환이 알런 역에 더블 캐스팅 됐다. “처음엔 연출을 맡고 계시는 조재현 선배님을 비롯해, 협력 연출가, 드라마터그 등 이미 이 연극 너무 잘 아시고, 너무 사랑하시는 분들과 작업을 하게 돼서 중압감이 좀 있었어요. 정말 연기 잘하시는, 목표로 삼아야할 멋진 배우 분들이 다 <에쿠우스>의 알런 역할을 하셨던 터라 겁도 많이 먹었고요. 제가 마음먹은 건 그 선배님들에 비해서 잘해야겠다, 색다른 알런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 지금 이 시대에 맞는 알런이 되어야겠다는 거였어요.”
2009 <에쿠우스>는 어느 때의 <에쿠우스>보다 쉽게 풀어보기 위해 애를 썼다. 이를 위해 무대에 오르기 3개월 전부터 배우들이 함께 연습기간을 가지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몸으로 부딪쳤다. “거의 한 달 동안 다 같이 계속 대본 리딩을 하면서 대사도 많이 바꾸고 관객들과 호흡할 수 있게, 쉽게 풀려고 노력했어요. 덕분에 이번 알런은 관객들과 많이 어울리고 호흡하는 알런이 된 것 같아요.” 연출을 맡고 있는 조재현은 연기의 포인트만 짚어줄 뿐, 자연스럽게 정태우가 느끼는 대로 할 것을 주문했다. 그렇게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 안에 알런을 담았고, 연습 기간 동안 본능적으로 연기가 나오도록 대사를 몸에 다 집어넣었다. 무대 위의 노출연기 때문에 5kg을 감량하고 회식자리에서 음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지만, 그의 첫 연극작업 과정 하나하나가 너무 즐겁고 소중하단다. “작업하면서 내내 너무 즐거운 거예요. 공연이 잘되니까 즐거운데, 알런은 <에쿠우스> 안에서는 전혀 즐겁지 않잖아요. 그래서 그 감정을 자꾸 다잡으려고 하는 중이에요.”

연기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다
그는 그렇게 6살 때부터, 자기 자신보다 배역에 더 많이

자신을 맞춰야 하는 ‘배우’라는 길을 걸어왔다. “일찍 철
이 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제 또래들과 생활하는 시간보다 선배들, 선생님들과 지내는 시간들이 많았기 때문에 연기적인 부분도, 삶의 부분도 제 또래 다른 사람들, 다른 연기자들보다는 도움을 받은 부분들이 많아요. 신앙도 더 깊어졌고, 연기에 있어서도 나름대로 배운 것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6살 때부터 ‘연기 잘하는 아이’라는 말을 듣고 자라온 그는 사춘기도 연기를 하며 겪어내야 했다. “어렸을 때 아역의 역할이란 게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려야 하는 거라서 내내 울어야 하는 거예요. 신마다 계속 울어야되는 것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밤샘 촬영을 해도 꼭 학교에 가서, 그 전에 내가 결석했었을 때 노트필기를 빌려서 다할 만큼 공부 욕심도 많았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그런 것들이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는 또 연기를 하며 그 시간들을 견뎌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시험을 잘 볼 자신이 없어 학교에는 촬영하러 간다, 집에는 학교에 간다고 하고 2~3일을 밖에서 보낸 일이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방황이었단다.
사실 그도 20대 초반에는 정말 방황이란 걸 좀 하고 싶었다. 그 무엇 때문도 아닌 연기를 잘하고 싶어서였다. ‘배우는 자유로운 인생이다. 세상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 모두 즐겨보면 그런 모든 상황들이 네가 연기하는데 도움을 줄 거다.’라는 말은 참 유혹적이었다. “그냥 배우로 봤을 때는 멋있는 거예요.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저도 그렇게 해보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는 것도 있었고, 신앙적인 부분도 있었어요. 꼭 직접적인 경험을 해야만 연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는 이제 ‘과연 정태우’라는 평을 들었던 제일 좋아하는 작품인 <대조영>의 검이도, ‘아역배우에서 성인연기자로 거듭났다’는 평을 들으며 배우 인생의 전환점이 됐던 <태조왕건>의 최응도, 실제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잘 소화해내는 배우로 성장해있다. 그리고 그에게는 연기에 있어서 누구보다 자신 있는 한 가지가 있다. “ 다른 것은 잘 모르겠는데 연기할 때 눈빛은 좋은 것 같아요. 연기할 때 내 눈빛만큼은 다른 누구보다도 잘할 자신이 있어요. 물론 다른 단점도 많지만요.” 무대를 압도하며 에너지를 뿜어내는 정태우의 알런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멀리서도 또렷하게 빛을 발하던 그의 눈동자는 마치관객들 한 명 한 명에게 자신의 에너지를 나누어주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의 목표가 최고의 배우는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주신 거잖아요. 정말 최고의 배우가 되고 싶다기보다 배우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도구로써 쓰이길 원해요. 배우들 중에 마음에 상처가 있거나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런 사람들한테 하나님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을 전해주고, 위로하고, 격려해줄 수 있는 바나바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자신의 일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그 분의 도구가 아닌, 그 분을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는 자신을 종종 발견하게 될 때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자신이 20년 넘게 해온 일을 그 분의‘도구’라고 인정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주신 거잖아요. 정말 최고의 배우가 되고 싶다기보다 배우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도구로써 쓰이길 원해요. 배우들 중에 마음에 상처가 있거나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런 사람들한테 하나님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을 전해주고, 위로하고, 격려해줄 수 있는 바나바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삶과 신앙을 나누는 든든한 가족
그의 어렸을 적 꿈은 가족끼리 손을 잡고 교회에 가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친가 쪽은 불교고, 외가는 기독교였어요. 친할머니께서 워낙 절실한 불교 신자셨거든요. 어머니가 교회 가는 것도 싫어하시고, 십자가 목걸이 하는 것도 싫어하셨어요. 제가 장남에 장손이거든요. 어머니가 저만이라도 교회에 나가면 가정이 변화될 거라는 믿음이 있으셔서 주일마다 저만 몰래 보내셨어요.” 그런 중에도 할머니는 교회에 나가지 말라며 어린 손자를 회유하시곤 했다. “어린 마음에 기도도 많이 했었어요. 지금은 다 교회 다니세요. 친할머니는 권사님 되셨고요. 어느 샌가 뒤돌아보니까 온 가족이 다 교회를 다니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획하심인 것 같아요.” 지난해 5월, 결혼을 앞두고 아내도 세례를 받았으니 그의 오랜 기도제목이 응답된 셈이다. 결혼하고 아기를 낳아야,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는 말이 이제는 조금씩 피부로 와 닿는다. 그에게는 4년 간 많은 것들을 나눠온 든든한 영적 가족도 있다. 온누리교회의 연예인 성경공부 모임 사람들이다. “옛날에도 연예인 성경공부, 연예인 교회가 있었지만 이렇게 연예인들이 정말 가족적으로 남들에게는 쉽게 말 못할 가정사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모임은 없었거든요. 자기의 연약한 모습들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은데, 이 모임에서는 그런 이야기들도 오가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영적인 상태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큰 축복인 것 같단다. 그를 하나님 앞에서 든든히 서가도록 도와준 사람으로 멘토 임동진 목사도 빼놓을 수 없다. “저를 막내아들이라고 생각하세요. 선생님은 존재자체만으로 힘이 되시는 분이에요. 선생님께서 어렸을 때 배우로서 받는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국제기아대책’을 소개해주셔서 지금까지 10년 간 꾸준히 봉사활동도 다니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어린 시절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던 그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쾌활하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180도 변화할 수 있었다고. 그렇게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 그의 내일이 더 기대가 된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그럴 게 있나요?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는데….”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 참말로 우문현답이다. 나를 다 아시는 그분께서,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의 힘이 느껴진다. 그 분 앞에서 ‘ 나’는 그냥 ‘나’이면 되는 것. 자꾸 무언가 덧붙이고, 치부를 가리고 싶은 ‘나’는 없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피천득 시인의 ‘인생이란 작은 인연과 오해를 풀기 위해 사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배우 정태우와의 작은 인연으로 연극<에쿠우스>를 보고, 소박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너무 오래되어 친숙해진 그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 그리고 누구나다 읽은, 그래서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베스트셀러 뒷장에 이어진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시작을 보았다. 드라마, 연극, 영화의 경계가 없는 배우가 되겠다는 그에게 스물아홉의 나이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정태우가 추천하는 영화 _ 렛미인

2008년에 개봉된 스웨덴의 로맨틱 공포 영화. 2008년 한 해 30여 개의 영화제에서 48개의 상을 수상하며 많은 비평가들과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북유럽 설원에서 펼쳐지는 외로운 소년 오스칼과 창백한 얼굴을 한 수수께끼의 소녀 이엘리의 가슴 설레고도 슬픈 사랑이야기가 압권인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