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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10 01-02 나는 내 나이가 좋다

나는 내 나이가 좋다 ㅣ 딴 짓 하는 삶, 적령기는 없다!



만약 춤과 노래와 오케스트라 연주, 정교한 무대장치가 어우러진 무대를
제대로 경험하고 싶다면, 그리고 만약 연인과 함께 가족과 함께 이 겨울이 가기 전 특별한 추억을 만들고 싶다면, 당신은 분명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선택할 것이다. 160분 동안의 마법이 풀리면, 2층까지 꽉 들어찼던 관객들 모두가 팬텀과 크리스틴, 그리고 라울을 기억하고 그들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극장을 나온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객은 그들을 연결
해주는 과묵하고 비밀스러운 여인‘ 마담 지리’를 기억할 것이다. 그녀가 있어서 더 아름다웠던 무대를 가만히 지켜볼 것이다. 아직은 한산한 잠실 샤롯데씨어터의 늦은 오후, <오페라의 유령>에서 마담 지리로 열연하고 있는 정영주 씨를 만났다.
글 정동현 | 사진 정미희




“예전에 <태양의 서커스 퀴담>이 장기간 내한공연을 했어요. 깜짝 놀랐던 것은, 출연진의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었지요.” 놀이, 양호, 학업 등을 담당하는 선생님 4명이 서커스팀과 함께 움직이며 아이들을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작은 배려들이 누군가의 꿈을 실현시키는 바탕이 된다.

다른 나이의 삶을 살아보는 것
“제 20대에는 뾰족한 꿈이 없었어요.” 정영주 씨의 20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만리장성에서 콘서트를 하겠다는 막연한 꿈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꿈이 아니라 이벤트에 가까웠다. 이것저것 겁 없이 덤볐다. 대학을 두 달만에 뛰쳐나와 처음 시작한 일은 에어로빅 강사였다. 한 2년 후에는 어머니 사업을 돕기 위해 의상 디자인을 배우러 다녔다. 그러다가 뮤지컬 배우 오디션을 우연히 지원하게 되었고, 합격의 기쁨을 얻었다. “그 때, 왜 제가 뽑혔는지 의문이었어요. 예쁘고 날씬한 동료들에 비해서 얼굴도 크고, 허벅지도 굵고…. 근데 심사위원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너같이 생긴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너를 뽑았다’고.” 바로 이 한 마디가 그녀의 인생을 여기까지 이끌어 왔다. 정영주 씨의 가장 열렬한 팬이자 지지자인 남편이 사용하는 인터넷 아이디의 뜻도, 번역하면 ‘대한민국에서 하나 뿐인 캐릭터’이다. 사실 그녀는 지금까지 나이에 맞는 역할이나 화려한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적이 별로 없었다. “서른 살에 뮤지컬 <페임>에서 흑인 여고생을 연기했던 게 어린 역할로는 유일했던 것 같아요.” 가끔은 아쉬움도 남지만 그녀는 이러한 독특한 경험들을 통해 사람과 인생을 더 광범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대에는 40대의 삶을, 30대에는 50대와 10대의 삶을 동시에 경험한 정영주 씨는 이제 40대의 첫머리에 서 있다.

‘아내’와 ‘엄마’로 사는 ‘여자배우’ 40대

정영주 씨는 지난 2000년에 결혼했다. 늦게야 가게 된 대학교에서 선후배 사이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면서, 그간 모았던 유학자금도 결혼자금으로 전용하였다. 하지만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남편은 저의 가치를 높게 생각해줘요. 배우로서의 제 일을 인정해주고 지원해주지요.” 정영주 씨에게 가족은 가장 큰 힘이 되는 지지자이다. 일이 끝나면 집에 가서 아들을 만나고 남편을 보는 것이 그녀의 기쁨이다. 공연 일정 때문에 많이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뮤지컬이 쉬는 월요일을 이용해서 가족들과 놀러 나가기도 한다. 물론 현실은 녹록치 않다.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아줌마로서 배우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아요.” 그녀가 보기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여성이 미혼 여성보다 더 열심히, 치열하게 일할 수 있는 측면이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견과 무관심은 높은 벽처럼 버티고 있다. 사실 가장 큰 어려움은 육아와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예전에 <태양의 서커스 퀴담>이 장기간 내한공연을 했어요. 깜짝 놀랐던 것은, 출연진의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었지요.” 놀이, 양호, 학업 등을 담당하는 선생님 4명이 서커스 팀과 함께 움직이며 아이들을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작은 배려들이 누군가의 꿈을 실현시키는 바탕이 된다. “‘특별한 감성’을 지닌 아줌마들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녀가 거듭 강조했다.

고비를 넘을 때, 손 잡아준 이
공연 도중에 목소리가 막히는 것만큼 뮤지컬 배우에게 있어서 소름 돋는 일이 또 있을까. 정영주 씨는 2006년 <메노포즈> 공연 중간에 바로 그것을 경험했다. 감기 끝 기침 때문인지, 노래하던 중간에 갑자기 성대 근육이 끊어진 것이었다. 수술을 받아도 예전처럼 다시 노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답을 얻지 못했다. 사람들과 연락을 끊은 채 몇 달 동안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무성한 억측과 소문, 근성 없는 배우라는 비난이 그녀의 상한 심령 위에 쏟아졌다. 그러나 그녀의 하나님은 ‘감내할 만큼의 고통’만을 허락하셨다. 의사들도 놀랄 만큼 빠르게 회복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전만큼 쉽게 노래하지는 못하지만, 지금 이렇게 노래로 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요.” 어두웠던 시간을 딛고 일어설 때도 아들과 남편의 역할이 컸다. 그녀의 초췌한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 주던 어린 아들이 없었으면 지금의 정영주도 없었을 것이라고. 이제 그녀는 또 다른 십년을 향하여 도약하고 있는 중이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섭고 싫은 일이에요. 내 삶에 대해서 누가 좀 대답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결국 최종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대답해야 하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시 웃으며 말을 맺었다. “앞서 간 선배들 중에 계속 활동을 하고 계신 분들이 있어서 참 위로가 되요. 저도 다른 이에게 그런 선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마흔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무엇인가가 또 있지 않을까요?” 그대가 있어서 다른 배우들이 빛이 나듯, 그대가 있어서 다른 이들의 삶이 풍성하고 아름다워지기를.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기간 : 2010년 8월 8일까지 장소 : 샤롯데씨어터

얼굴 한쪽이 흉측하지만 매혹적인 목소리를 지닌 유령‘ 팬텀’과 그를 연민하는 여주인공 ‘크리스틴’의 이루어질 수 없는 러브스토리가 잔잔하게 그려지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1900년대 파리의 오페라하우스를 배경으로 웅장한 무대, 아름다운 음악, 화려한 의상, 특수효과가 한데 어우러져 보는 내내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공연 도중 1톤 무게의 대형 샹들리에가 천장에서 곤두박질치는가 하면, 오페라하우스가 순식간에 안개 자욱한 지하호수로 변해 281개의 촛불 사이로 나룻배가 등장하기도 한다. 효과적인 무대 활용과 마법 같은 특수효과가 빚어낸 세계는 낭만적이고 황홀하다.